자신의 제물을 움켜잡아 사지를 노끈처럼 휘늘어뜨리고 목을 부러뜨리고, 등골을 꺾고, 통뼈를 이루는 목질의 미세한 결 속까지 파고들어 그 층을 낱낱이 칼질해 화염의 절구통 속에서 가루로 바수어버리는 폭군 같은 신, 그는 눈곱만큼의 부끄러움도, 잠깐의 망설임도 없었다.
--- p. 158
숲에서 가장 나쁜 것은 두려움이에요. 공포심, 바로 그것이 가장 무서운 적인 것이죠. 짐승들은 숲속에서 공포를 느끼는 자들을 가장 두려워해요. 역설적인 의미에서 겁쟁이는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죠. 나무 작대기로 뱀을 후려쳐 죽이는 자들은 그러한 행위로 자신이 겁쟁이이고, 세상에서 지극히 두려운 존재, 나쁜 자식임을 입증할 뿐이죠. 공포는 무기와 그에 비례하는 무분별한 용기를 동반하니까요. 인간 중심의 불결, 불쾌, 불안의 이미지들을 버릴 때, 바로 그 순간 숲은 모든 생명체들의 코스모폴리스, 지구 연합으로 거듭날 수가 있어요.
--- p.183
망각이나 절망 따윈 없이 절정에서 곧바로 죽음 쪽으로 내리막길을 찾는 불의 저 수직성. 때문에 모든 불꽃은 이렇게 소리치는 듯이 여겨졌다. '한 번뿐, 오직 한 번뿐!'이라고. 그런데 왜 그 외침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한번, 다시 한번!'이라고 메아리로 공명하는 것일까?
--- p.160
노인은 잠시 더 머물며 검은색의 굳은 덩어리들이 청색 물감으로 풀어지는 것을, 그리고 띠처럼 가늘어진 안개가 서서히 젖빛을 띠는 것을 지켜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 p.259
권 소장에 관한 기억에서 지금도 선연하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사통팔달한 그의 박식과 남도 사람 특유의 입심이다. 그는 명실공히 잡학의 대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 점은 소장실에 나뒹구는 삼십여 권의 책을 통해서도 익히 알 수가 있었다. 연금술이나 점성술과 같은 다분히 밀의적인 책에서부터 사진, 새, 민물고기, 고고학, 민중신학, 풍수, 신화, 고대 이집트, 성격은 물론이고 코란과 동의보감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갈래를 잡을 수 없는 서적들이 문어발식의 지적 편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기에 그의 전공인 토목을 덧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인데, 그도 자기 직업에 대한 응분의 예우를 갖추기 위해 서가의 지정된 자리에 일어와 영어로 된 관련 서적을 신주처럼 모셔두는 것이었다.
---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