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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우리를 기억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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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 top10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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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124*188*20mm
ISBN13 9791191384581
ISBN10 119138458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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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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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친구들이 교복에서 튀김 냄새가 난다고 했다. 우리 집 냄새였다. 기름 냄새가 몸에 배어 살냄새가 되었는지 옷 속으로 얼굴을 파묻어도 맡을 수 없었다. 치킨 장사는 제법 잘 되었지만 엄마의 끼니는 항상 뒷전이었다. 빚은 불어났고 가구들은 순식간에 빨간딱지로 뒤덮였다. 아빠는 밤마다 술을 마시고 들어와 속을 게워댔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꿈속으로 잠기길 바랐다. 아빠가 미운 만큼 엄마를 돕고 싶었다.
--- p.21

어른들은 내게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 참을 줄 알아야 어른이 되는 것이라 믿어왔다. 지금껏 서서 일하는 엄마의 무릎 같은 것일까. 취업 전쟁 대학생 때는 더욱 그랬다. 일어서는 법보다는 참는 법부터 배우고,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느라 다들 혼이 나갔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마음 맞는 동기들이 모여 프로젝트를 구상했고 콘텐츠를 제작했다. 그래서 만든 페이스북 페이지는 백만 팬 수를 가진 ‘오빠랑 여행 갈래?’ 가 되었다.
--- p.37

나뭇잎을 움켜쥐고 바스락대면 손바닥이 붉게 물들 것도 같았습니다. 단풍 물이 떨어지는 가을 아래 서면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갈수록 짧아지는 가을은 붙잡고 싶은 기억들만 꺼내고 사라집니다. 내게 가을이 느긋한 계절이라고 일러준 사람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였습니다. 할아버지 집 앞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 p.39

그동안 슬픔을 숨기고 살아왔다. 슬픈 얼굴을 외면하고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왔다. 밤이 오면 슬픔을 덮어두었으며 삼키지 않기 위해 토해냈다. 내 곁에 붙어 있으면 안 되는 존재라 생각했다. 하지만 떠나온 이곳들의 밤은 무자비하게 슬픔을 던져 놓았으며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게 했다.
--- p.56

외로움을 삼키고 지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을까. 그간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으나 잊고 살았던 거였다. 쓸쓸함은 내 것으로 생각하며 떠안고 보니 먼 길은 늘 혼자였다. 혼자 남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보듬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 p.71

나는 종종 마음이 허기지거나 먼 길을 떠날 때 계란을 찾는다. 부엌이 허전하면 네댓 개씩 삶아 옹기종기 모여 있게 둔다. 뜨거운 냄비에서 부딪히는 호들갑이 좋고, 뽀얀 피부에 노란 속살은 연약하고 퍽퍽한 인생 같다. 배고픈 누군가에게 주는 한 알은 목메게 퍽퍽할 것이고, 촉촉한 위로로 충분하다.
--- p.101

흐른 뒤 한발 다가오면 두발 물러서 있는 관계가 있다. 그리고 길게 떠나서야 부서지는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때 묻은 인연도 시간을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을. 홀로 부단히 애쓰던 관계는 서서히 정리가 되고 그것들로 인해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로 했다. 오래된 집에서 고운 구슬을 꿰는 노인처럼 곁에 두고 싶은 인연들만 손에 거머쥐었다. 잊어야만 하는 사람과 얻어지는 사람이 있어서 인생은 이상하고 재밌다.
--- p.121

탓에 거리는 한산했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면 사사로운 소리는 자연스레 물러나게 된다. 별다른 생각 없이 걷다가 카피텔광장에서 들리는 악기연주에 몸을 돌렸다. 여인을 가만히 지켜보는 한 사내와 마치 그를 위한 연주처럼 보이는 악기. 그 둘의 미묘한 그림자에 멜로디가 섞여 그렇게 광장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광장을 스치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 어느덧 그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연주가 끝나고 젖어 있는 바지의 밑단처럼 축축해진 분위기에 누구도 쉽사리 발을 옮기지 못했다.
--- p.149

그렇게 그늘 한 점 없는 뜨거운 골목을 누비며 하릴없이 걷고 또 걸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빨래들은 어느새 바싹 마르고 햇볕의 따가움도 모른 채 수줍어하는 두 소녀의 얼굴을 보려니 마음이 소란해진다. 이따금 돌이켜보면 그동안 걸어왔던 여행 속에는 늘 '사람'이 존재했다. 무심코 지나가다 마주친 어린아이의 눈빛에 발길을 돌리거나 열차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받는 것 그리고 여행자라는 이유로 같은 길을 걸었던 동행과 헤어짐 앞에 눈물을 보였던 날까지. 사사로운 감정이 뒤엉켜 여행의 농도가 짙어질 무렵,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이들은 '내 사람'이 되어있었다.
--- p.201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피렌체로 떠났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요. 시뇨리아 광장에서 당신과의 마지막 여행을 떠올렸습니다. 미켈란젤로 언덕은 밤하늘에 당신을 그리기 충분했지요. 당신과의 시간이 그리운 것인지 당신이라는 사람이 그리운 것인지. 이렇게 마음이 허해서 불어오는 바람이 얄궂기도 했습니다.
--- p.212

처음은 당신이 생각나서. 다음은 당신을 잊으려고. 마지막은 당신을 잊지 못해 그곳에 두기로 했다. 촌스러운 마음을 위로받으려면 겨울만큼 좋은 계절이 없겠다. 네 계절 내내 추운 곳으로 떠나야 깊숙이 여밀 수 있을까. 춥지만 따뜻한 온기가 집마다 번지는 아이슬란드처럼 그곳에서 여미고 나면 내게도 봄이 올까.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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