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튜 바렛은 당신을 영화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에 나오는 시간 여행 자동차 들로리언(DeLorean)에 태워 여행에 데려가고 싶어 한다. 목회자와 신학자와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우리가 흔히 읽는 방식과 다르게 성경을 읽었던 때로, 교회의 신학과 경건에서 주권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정통 삼위일체 교리가 태어났던 때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 왜 이 여행이 필요한가? 왜 당신은 그를 따라나설 생각을 해야 하는가? 바렛은 미치광이 과학자가 아니며, 그의 시간 여행 계획은 지나간 교회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감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OST에 참여한 록 밴드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Huey Lewis and the News)의 노래 제목을 인용하자면, 바렛은 당신이 “시간을 거스르길”(back in time) 원한다. 이는 그가 교회의 교리와 경건과 증언과 예배의 미래가 위태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전적 개신교 신학자들은 교회의 교리와 삶의 두 기초를 말했다. 이들은 성경을 인식론적 기초(cognitive foundation)로, 교회가 믿고 실천해야 하는 모든 것의 최고 근원이자 규범으로, “경건함에 속한 진리”(딛 1:1)의 기초로 규정했다. 이러한 인식론적 기초 외에 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교회의 교리와 삶의 존재론적 기초(ontological foundation)로 규정했다. 존재의 질서에서 만물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에게로 돌아간다(롬 11:36). 그러므로 존재론적 이해 및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서에서, 이들은 만물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으며, 그분에게로 돌아간다고 판단했다. 창조와 섭리,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 교회와 성례, 구원과 마지막 것들에 관한 교리 하나하나의 의미와 중요성이 삼위일체 교리에 달렸다. 이러한 교리에 기초한 경건의 삶이 우리를 우리의 최고선이자 최종 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 곧 예수님이 아버지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아들이시라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 고백의 기초다(마 16:16; 28:19; 막 12:1-12; 엡 2:20). 이런 까닭에,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삶의 기초다. 삼위일체 교리가 없으면 기독교도 없다.
바렛은 시간을 거스르는 여행에 당신을 데려가길 원한다. 북미와 영국의 많은 개혁주의 교회와 복음주의 교회가 최근에 이 기초 교리와 단절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곤경은 단지 기억 상실에서, 즉 전에 알았던 것을 잊어버린 데서 비롯되지 않았다. 우리의 곤경은 삼위일체에 관한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교회가 잘못 교리화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러 이유로, 바렛은 이 책에서 숱한 20세기 말 복음주의 신학자들을 살펴본다. 이들은 삼위일체에 관한 기독교의 고전적 가르침에 공통된 여러 특징을 소홀히 하고 거부하며 (또는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며) 그 자리에 삼위일체에 대한 새롭고 현저하게 왜곡된 해석, 즉 그가 ‘조작된 삼위일체’(the manipulated Trinity)라고 일컫는 해석을 대신 밀어 넣은 신학자들이다. 이런 접근법은 삼위일체 위격들 간의 구분을 유지했으나, 삼위일체의 단일한 존재와 본질을 나누고 위격마다 다른 속성을 부여함으로써(예를 들면, 아버지에게는 권위를, 아들에게는 복종을 부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최고이자 단일한 의지를 나누는 잘못을 범했다. 지난 수십 년간, 이러한 삼위일체 접근법은 대중적 스터디 성경과 교재, 잡지, 컨퍼런스를 통해, 그리고 북미와 영국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이 있는 몇몇 목회자 양성 기관에서 이 접근법이 점점 득세함으로 인해 복음주의 진영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교리 교육과 관련해 주로 수정주의적인 이러한 작업은 대체로 성공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조작된 삼위일체를 기독교의 정통적 가르침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자는 바렛의 초대를 흔쾌히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 가르침의 최고 기초와 단절되었다면, 동시대인에게 형편없는 훈련을 받았다면, 더 나은 충실한 선생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설령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더라도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선생들이 있다. 이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무엇이며 어떻게 자신을 성경에 계시하셨는지 더 잘 이해하도록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과거 여행은 과거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기독교의 정통적 가르침 같은 귀중한 것을 잃었다면 그 가르침을 회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자녀와 교회가 더 견고한 기초 위에 신앙을 세울 수 있으며, 더 환한 별빛에 의지해 우리의 경건이 나아갈 방향을 재설정할 수 있고, 더 신뢰할 만한 기준에 맞춰 우리의 증언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자는 바렛의 초대에 흔쾌히 응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주권적인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힘입어, 모든 시대를 초월한 하늘과 땅의 성도들이 오직 거룩하신 삼위일체만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에서 그분께 올려드리는 찬양을 함께 부를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제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여행을 즐겨라. 바렛은 능숙한 운전자이며 믿을 만한 길라잡이다.
조작되지 않은 삼위일체를 (다시) 발견하자는 바렛의 초대에 당신이 응해야 하는 마지막 이유가 있다. 최근 삼위일체 신학은 몇 걸음을 크게 잘못 내디뎠다. 그중 하나는 삼위일체가 다양한 실제적·사회적·정치적 목적에 유용하다고 입증될 수 있는 한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퇴보다. 삼위일체는 우리를 위해 또는 우리의 의제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고전 8:6). 삼위일체는 그분 자체가 목적이시다(롬 11:36). 그러므로 삼위일체 공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이해하며 소중히 여기고 흠모하며 더 잘 예배하고 섬기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 삼위일체를 공부하는 것은 삼위일체를 우리의 다양한 사회적 프로그램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삼위일체를 공부하는 목적은 우리의 마음과 의지와 행동과 소통을 삼위일체께 맞추기 위해서다. 이렇게 할 때, 삼위일체 안에서 우리의 존재 이유와 충만한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시 16:11; 요 15:11; 17:13).
스콧 R. 스웨인(Scott R. Swain)
플로리다주 올랜도 소재 리폼드 신학교 총장 겸 제임스 우드로 하셀(James Woodrow Hassell) 조직신학 교수
--- 「서문. 스콧 R. 스웨인(Scott R. Swain)」 중에서
[전략] 많은 복음주의 교회와 목회자가 삼위일체를 단언해야 한다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를 단언한다. 그러나 솔직히 이들은 “성경이 어디선가 그렇게 말하지 않나요?”라고 말할 뿐(이들은 그렇게 말하는 성경 구절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삼위일체를 단언해야 하는 다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이들에게 동일한 삼위일체를 성경적 정통에 따라 분명하게 표현하라고 해보라. 멍한 시선이 돌아올 것이다. 당신이라면 삼위일체를 지금 당장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의를 제기할는지 모른다. “교수님, 잠깐만요. 최근 몇 년 사이 신학이 되살아나지 않았나요?” 맞는 말이다. 세기가 바뀔 무렵, 단지 우유가 아니라 고기에 굶주리고 영양실조에 걸린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신학을, 단지 아무 신학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을 되살리려고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제 세기가 바뀌고 20년이 지났다. 되돌아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큰 구멍들이 보인다. 사각지대들이다. 무시하기엔 구멍이 너무 크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원사에서 초점을 온통 하나님의 크심에 맞춘 나머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 가운데 누구이신지 놓쳐 버렸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구원 이야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무엇을 성취하셨는가 하는 것뿐 아니라 그분이 그분 자체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계시한다. 얼마나 멋진가! 되살아난 개혁주의는 개혁주의의 전부가 아니거나 적어도 마땅히 개혁되어야 할 만큼 개혁되지 못했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젊고 열정적인 개혁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데서 그친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가 되살아난 와중에도, 이것이 초래한 모든 흥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적 정통 삼위일체 교리로부터 표류했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있다. 내가 그렇게 부르길 좋아하듯, 삼위일체의 표류(Trinity drift)는 갑작스럽고 폭발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점진적이었다. 내 말을 못 믿겠는가? 우리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자.
[중략] 우리는 마치 들로리언을 타고 역사 속을 활보할 기회를 잡기라도 하듯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복음주의의 미래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과거를 들여다보면서 만약 현재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미래가 어디로 갈지 볼 수는 있다.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를 계속 모방하는 현재 궤도를 고집한다면 복음주의자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겠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지난 40년을 냉정하고 정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삼위일체 신학의 미래가 왜 위험에 처하게 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브라운 박사의 들로리언이 당신을 21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으로 데려가 어느 복음주의 대학에 내려 준다면 당신의 눈에 무엇이 보이겠는가? 아마 지금보다 한결 젊은 내가 구내식당에 앉아 파란 하드커버의 두꺼운 책을 읽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표지에는 모세가 광야를 바라보는 네모난 그림이 있다. 모세의 그림만 없다면 이 큰 책을 의학 백과사전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책을 안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다. 이 책은 성경의 교리를 명료하고 신뢰할 수 있게 요약했고, 그래서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다.
그러나 당신의 들로리언이 아주 섬세해서 단지 어느 대학 캠퍼스가 아니라 신학 대학이 있는 캠퍼스에 당신을 내려 준다고 하자. 당신은 들로리언에서 내려 이동식 커피 판매대를 지나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간다. 거기서 나를 다시 발견한다. 이번에도 나는 여전히 두꺼운 책에 파묻혀 있다. 그러나 이번 책은 표지에 파랗고 붉은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이 있고 그 중앙에 십자가가 자리한 게 다르다. 밀러드 에릭슨(Millard Erickson)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다. 이 책은 교리에 철학적 풍미를 가미하고 추론을 통해 엄밀하고 논리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이 때문에 인기가 있다.
나는 이런 책들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를 처음 접했다. 물론, 나는 삼위일체를 믿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러나 내가 왜 그리스도인인지 몰랐다. 그래서 젊고 야심 찬 학생으로서 기독교 신학을 배우려는 열정으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강의실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너무나 중요한 삼위일체를 더 배울 기회를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내가 배운 삼위일체의 접근 방식은 자연과학과 흡사했다. 사람들은 삼위일체를 수수께끼처럼, 심지어 문제처럼 여겼다. 정확한 공식으로 풀 수 있는 문제처럼 취급했다. 성경의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를 가르치지 않았고, 그래서 삼위일체를 다루는 사람들은 수학적이어야 했다. 첫째,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말하는 구절들을 더하고 나열하라. 둘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완전히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구절들을 더하고 나열하라. 그러면…자, 어떤가! 우리는 하나님이 한 본질에 세 위격(one essence and three persons)이심을 알게 된다. 끝.
[중략] 그러나 이런 교과서들에서 삼위일체에 관해 읽었을 때, 나는 삼위일체가 억지, 즉 임의적 증거 본문을 수집한 긴 목록의 총합이라고 느껴졌을 뿐 아니라, 속임수 마술의 결과처럼 느껴졌다. 마치 삼위일체가 어디선가 느닷없이 휙 튀어나온 것 같았다. 검은 모자에서 튀어나온 토끼처럼 말이다. 나는 또 이상하고 불안하기까지 한 것도 보았다. 대학교와 신학교에서 읽은 교과서마다,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오래된 기독교 신앙, 곧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심을 믿는 신앙을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이 책들은 단순히 많이 사랑받는 교과서 정도가 아니라, 존 페인버그(John Feinberg), 브루스 웨어(Bruce Ware), 로버트 레이몬드(Robert Reymond),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 J. P. 모어랜드(J. P. Moreland)를 비롯해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가장 높이 추천하는 신론(神論) 책이었다. 이 사상가들을 비롯한 그와 같은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으며, 신뢰할 이유가 충분한 교수들이 이들의 책을 교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공통된 약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영원한 출생(eternal generation)이라는 오래된 교리를 거부했다. 이 교리를 뒷받침하는 성경 본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증거 본문이 한 장은 고사하고 한 절도 없기에 이 교리는 이들의 목차에 포함될 수 없었다. 이들의 공식에 들어맞지 않았던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교회의 신앙을 합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합리적이지 않으면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원한 출생이 무엇인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말라. 실제로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사실, 뭐라고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단순하다. 자신에게 물어보라. 왜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이름을 사용해 삼위일체를 표현하는가? 대답은 이렇다. 성경에서, 특히 요한복음 같은 책에서, 아버지가 아버지라고 불리시는 것은 그분이 아들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그분은 자신의 아들을 낳으신다. 결국, 이것이 아버지라는 말의 뜻이다. 그러나 이분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이기에 영원 전에(from all eternity, 영원 전부터) 아들을 낳으신다. 아버지는 그 누구에 의해서도 나지 않지만, 자신의 아들을 영원히 낳으신다. 이것은 아버지가 근원 또는 기원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버지되심’(paternity, 성부되심)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아들이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분에게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라. 아들은 영원 전부터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나오며, 자신의 아버지에 의해 나신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아들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신적 본성으로부터 출생하신다. 여기서 ‘나다.’(begotten)와 ‘출생하다.’(generated)는 동의어다. 결국, 이것이 아들이라는 말의 뜻이다. 이것을 ‘아들되심’(filiation, 성자되심)이라고 한다. 성경에서 성령이 성령이라고 불리시는 것은 그분이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發出)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또 하나의 아들(형제)이 아니며 손자도 아니다(그러면 기괴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영원히 출생하신다거나 나신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송되신다. 이것을 ‘출송’(出送, spiration)이라고 하는데, ‘영’(Spirit)이라는 단어의 성경적 의미를 내포하는 용어다.
우리는 지금 핵심 단어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적 이름 셋 모두를 요약하는 어구도 언급해야겠다. ‘기원의 영원한 관계들’(eternal relations of origin)이다. 이는 기억해야 할 어구다. 이 어구에 밑줄을 긋고 형광펜으로 칠하라. 동그라미도 치라. 복잡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 의미는 아주 단순하다. ‘기원’(origin)이라는 단어가 적절한 것은 세 위격이 어디에서 왔는지 기술하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영원한’(eternal)이라는 단어가 적합한 것은 우리가 염두에 두는 하나님이 이러하시기 때문이다. ‘관계’(relation)라는 단어는 삼위일체의 위격들, 구체적으로 각 위격의 고유한 것을 가리키는 또 다른 방식이다(예를 들면, 아버지는 나지 않으시고, 아들은 나시며, 성령은 출송되신다).
이제 들로리언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나 자신의 방식으로 이것을 파 내려가면서, 삼위일체를 기술하는 이 고대의 방식이 내가 그렇게 표현하듯이 ‘규범’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2천 년 동안, 교회에서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삼위일체를 정의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믿었다. 나는 입이 벌어져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내게 삼위일체를 소개하는 교과서들과 선생들은 마치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자신들의 접근 방식이, 영원한 출생을 기꺼이 몰아내는 접근 방식이 표준인 것처럼 행동했다. 주변 사람들도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비슷하지도 않았다. 삼위일체가 급진적 방식들로 재구성된 것은 지난 세기에, 우리 세대에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더 깊이 파 내려갈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 최고의 성경 해석자들이 교회가 태동했을 때부터 영원한 출생 같은 교리를 고백했을 뿐 아니라 이 교리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장 위험한 이단들로부터 지켜 낸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우리는 삼위일체에 더없이 본질적인 신앙을 말하고 있다. 아들이신 아들을 아버지이신 아버지와 구분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에 더없이 본질적이었다. 그래서 4세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교부들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 of Nicaea,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공의회일 것이다)로 모여 영원한 출생을 진정한 정통의 조건으로 확정하는 신경을 작성했다(2장을 보라). 이들은 아들이 영원 전에 아버지의 신적 본질(divine essence)로부터 나지 않으면 신성(deity)에서 아버지와 동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교리는 아들의 위격을 아버지의 위격과 구분했을 뿐 아니라 두 위격이 신성과 능력과 의지와 영광과 권세에서 함께 영원하고(coeternal) 동등하다(coequal)는 것을 확실히 했다. ‘영원한 출생을 단언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그것도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았다. 영원한 출생을 부인하는 것은 이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복음주의자들이, 십자가 중심적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신앙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삼위일체의 기본이 복음주의 교과서들에서 잘려 나갔고 복음주의 강의실, 내가 삼위일체를 배워야 했던 강의실의 화이트보드에서 지워졌다는 것은 아무리 줄여 말해도 기겁할 일이었다. 그때 우리가 삼위일체의 표류를 겪었고 여전히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우리는 선조들의 삼위일체를 사회적 삼위일체, 곧 우리의 사회적 의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작해도 되는 삼위일체와 맞바꿈으로써 성경적 정통에서 벗어나 표류했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관계성들의 사회로 재정의했다. 여기서 각 위격은 각자 의식과 의지의 중심으로서 서로 협력하며, 이로써 우리는 삼위일체를 우리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인간 사회의 원형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각 위격이 각자 의식과 의지의 중심으로서 서로 협력한다는 생각에 대해 이전 세대는 ‘삼신론’(tritheism)이라는 꼬리표를 붙였었다.
우리가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복음주의자들도 사회적 삼위일체의 공기를 호흡해 오면서도 우리의 삼위일체가 바르고, 다른 것이 섞이지 않았으며, 산의 공기처럼 맑고 성경적이라고 줄곧 확신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스모그가 사라질 때, 복음주의 삼위일체 교리가 성경적 정통과 까마득히 멀다는 게 분명해진다.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 보라. 스모그(현대 신학)가 로스앤젤레스를 휩싼다. 마치 두꺼운 담요가 로스앤젤레스 주민들을 뒤덮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이 이 도시에 들어와 우리에게 해주는 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슨 스모그가 있다고 그래?”라고 하며 무시하거나, “내 장담하건대 괜찮아!”라고 하며 공기 질이 좋다고 스스로를 확신시켰다. 이는 우리가 호흡하는 모든 삼위일체 스모그를 보는 새로운 시각뿐 아니라 새로운 공기 자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성경적 정통의 옛 바람만 이 공기를 공급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니케아 정통이다. 진짜 삼위일체가 일어나야 할 때다. 교회가 ‘단순한 삼위일체’(simply Trinity)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해야 할 때다. 섞이지 않은 삼위일체, 오염되지 않은 삼위일체, 조작되지 않은 삼위일체를 말이다.
--- 「1장. 표류하는 삼위일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