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넌 누구니?”
“엄마 아들이에요.”
“내 아들이라고?”
엄마는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네, 당신이 제 엄마예요.”
“그러면 좋을 텐데.”
엄마는 아쉬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에요! 내가 엄마 자식이에요. 엄마가 날 낳았어요.”
“내가, 너를? 하지만 그러기엔 네가 너무 큰 것 같은데.” ---p.15 〈그런데 너는 누구니?〉
크리스마스 요리를 하는 동안 나는 엄마의 포스트잇 메모를 처음으로 자세히 보게 되었다. 부엌에 있는 두 개의 찬장 문은 온갖 종류의 메모지로 덮여 있었고, 이미 세번째 찬장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메모지는 시간이 갈수록 점차 늘어났고, 엄마에게는 이러한 현상이 코 위에 걸친 반달 모양의 안경처럼 일상이 되어버린 듯했다. ---p.65 〈쌓여가는 메모들〉
다음날 엄마는 영화관에 다녀왔다는 사실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 프로그램 가이드에 표시해둔 똑같은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했고, 내가 어제 그 영화를 함께 봤다고 말하면 충격을 받았다.
“이럴 수가. 이런 멍청이! 이건 너무 절망적이야!”
끊임없이 이어지는 건망증과의 싸움은 엄마를 더욱 힘들게 했다. 나는 엄마가 틀리는 부분을 꼬집어내 바로잡아주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비록 ‘엄마가 다 알고 있는 거잖아요!’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기는 했지만. ---p.90 〈잃고 싶지 않은 건 열쇠만이 아니야〉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던 한 여성이 아무도 모르게 이 같은 경도 치매에 걸려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누나들은 나와 다르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오랫동안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하지 않고 속으로 억누르기만 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여겼다. 나는 기본적으로 우울증이라는 의견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가 심리적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게 솔직히 더 마음에 들었다. 치매에 비해 우울증은 최적의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치료가 가능하다는 장점. ---p.119 〈차라리 우울증이면 좋을 텐데〉
“사람이 나이가 들면 기억의 가치가 전혀 달라져. 젊은 시절엔 끊임없이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하는데, 언젠가 그 생각의 방향이 정반대로 향하게 되고, 뒤를 돌아보게 되는 거지. 사람이라면 꼭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한다면 인생은 정말 무익해지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년에야 비로소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이가 많은 거지. 모든 사람은 언젠가 죽어. 그렇게 무無로 사라지지만, 그들은 기억 속 계속 살아가고 있는 거야.”
아버지의 말이 온종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p.142〈당신한테 활짝 피어 있는 꽃을 보여줄게〉
나는 혈관주사를 맞느라 부어오른 엄마의 손을 잡아 어루만져주었다. 그때 엄마가 잠깐 눈을 뜨고 말했다.
“정말 좋아, 좋아, 잘했어.”
밖은 계속 어두워졌고 내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를 위한 태양이 또다시 솟아오를 수 있을까? 정말 복잡했다. 더이상 아무것도 물어볼 것 없는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물어보고 싶었던 것들이 모두 떠오른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다. 오늘밤, 열이 나는 엄마 곁을 지키며 미처 묻지 못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p.250 〈계속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
“저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구나.”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프로그램을 보았다. 스튜디오의 초대 손님 중 한 명은 노신사였는데, 그는 어휘력장애를 겪는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아내의 치매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건 유감이야, 유감이야, 유감이야, 그래서 그건 더, 더, 더.” (중략)
사실 엄마는 이미 꽤 오랜 시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식물을 보살피는 것처럼 우리는 엄마가 시들지 않게 지키고 있다. 이 꽃이 시들도록 놔두어야 하는 것일까?
---p.282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