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기준도 없이 사물을 판단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시계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같다. 한 사람은“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라고 말하고, 또 한 사람은 “아직 4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나는 내 시계를 보고 먼저 사람에게 “당신은 권태에 빠져있군” 하고 말하고, 나중 사람에게 “당신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는군” 하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실은 시간이 한 시간 삼십 분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당신에게는 시간이 가는 것이 늦는구려. 당신 멋대로 시간을 재고 있군”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내가 내 시계로 시간을 재고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p.36, 「단장 5」 중에서
사람을 효과적으로 훈계하여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려면 그가 어떤 관점에서 사물에 접근하고 있는가를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물은 흔히 그의 관점에서 보면 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만, 그 대신 애초 그의 관점이 잘못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는 만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문제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보는 것을 게을리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런데 인간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보지 않은 데 대해서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지만,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은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은 천성적으로 모든 관점에서 사물을 볼 수는 없다는 것과 감성(感性)에 의한 지각은 언제나 진실하므로 인간은 자기가 택한 관점에서는 본래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 p.37, 「단장 9」 중에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의 선택이다. 그런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이다. 습관이 사람들을 석공(石工)으로 만들고, 군인으로 만들고, 미장공으로 만든다. “저 사람은 훌륭한 미장공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리고 군인을 가리켜 “저놈들은 미친놈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에 반대하여“전쟁처럼 위대한 것은 없다. 군인 이외의 인간은 모두 무용지물이다”라고 말한다. 어렸을 때부터 어떤 직업이 인기가 있고, 다른 직업이 천시된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직업을 택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미덕을 좋아하고 어리석은 것을 싫어하여, 그런 말들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올바로 적용(適用)하지 못할 뿐이다. 습관의 힘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어서, 자연은 단지 인간을 창조했을 뿐인데 인간이 여러 가지 신분을 만들어 냈다. 어떤 고장에는 석공이 많고, 다른 고장에는 군인이 많았을 때도 있으니 말이다. 분명히 자연은 그렇게 한결같지 않다.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습관이다. 습관이 자연을 위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자연이 습관을 제압하고 선·악 간의 모든 습관에 항거하여 인간을 본능에 내맡겨 두기도 한다.
--- p.84, 「단장 97」 중에서
건강할 때는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하지만, 실제로 병에 걸리면 기꺼이 약을 마신다. 병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다. 기분전환이나 산책하고 싶은 욕구도 건강할 때는 일어나지만, 일단 병에 걸리면 그런 욕구는 일어나지 않는다. 건강했을 때의 욕구는 병들었을 때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 맞는 욕구를 불어넣어 준다. 우리가 자연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우리 자신의 탓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두려움뿐이다. 두려운 감정은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상태를 우리가 처하지 않은 상태의 욕정과 결부시킴으로써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자연은 우리를 어떤 상태에서나 항상 불행하게 하므로, 우리의 욕망은 우리를 위해 행복한 상태를 머릿속에 그린다. 왜냐하면 그러한 욕망은 우리가 현재 놓여 있는 상태를, 우리가 현재 놓여 있지 않은 상태의 즐거움과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즐거움에 도달하게 되더라도 그것에 의해 행복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새로운 상태에 이르면 또 다른 욕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인 명제(命題)는 세분되어 각각의 경우에 적용되어야 한다.
--- p.92, 「단장 109」 중에서
비참. 비참한 우리를 위로해 주는 유일한 것은 기분전환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비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 자신에 관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여,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이 기분전환이기 때문이다. 기분전환이 없으면 우리는 권태에 빠질 것이며, 이 권태는 우리로 하여금 거기서 벗어나는 더욱 확실한 수단을 찾아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기분전환은 우리의 세월을 흘려보내어,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죽음으로 인도한다.
--- p.118, 「단장 171」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