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은 회중의 의지를 변화시키기 위해 로고스를 통해 감정(파토스)에도 역사하신다. 설교자는 본문에 담긴 감정을 회중의 일상과 지정의를 총체적으로 고려하면서 창조적으로 되살려서 전달해야 한다. 무엇보다 회중의 일원인 설교자는 성령님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본문의 세계, 즉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현대 회중에게 들려주어야 한다(고전2:4). 그러면 회중은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빛으로 자신이 밟고 사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유의미하게 해석하면서 설교에 참여하게 된다.
--- p.13
요한복음의 주요 신학은 ‘기독론에 근거한 구원’인데, 구원 곧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아들(20:31), 왕(1:49; 18:33,37,39; 19:3,12,14,15,19,21; 참고. 12:13, 156:15), 제사장(요17장), 그리고 선지자다(4:19; 6:14, 40; 9:17; 참고. 4:44; 7:52). 요한복음에는 무려 98회에 걸쳐 동사 ‘믿다(πιστεuω)’가 등장하여, 믿고 실천하는 역동성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15, 18, 21장을 제외하면 매 장에 동사 ‘믿다’가 등장한다. 또 다른 주요 신학은 구원론과 교회론의 결합이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가족 안에 태어나는 것인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이 그분의 자녀에게 임한 결과다(요1:12).
--- p.20~21
요한의 목회를 받던 1차 독자인 요한공동체는 불신 유대인들로부터 출교를 비롯하여 여러 박해를 받았다(요9:22). 1차 독자는 예수님을 모델로 선교적 제자도를 추구했기에, 불신 유대인들인 모세의 제자들과 대결했다(요9:28). 이때는 베드로의 순교를 초래한 네로 박해가 시작되기 직전의 상황으로 보인다(요21:18-23). 이 메시지는 유비를 통해서 오늘날에 적용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를 향하여 막강 권세를 부리는 불신 유대인은 누구이며, 자신을 신격화하는 황제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가족의 경계선과 ‘진리 안에서 사랑의 실천’이라는 가훈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는 무엇인가?
--- p.32~33
선교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세상에서 게토처럼 존재하는 기독교 분파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가족에 편입된 성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을 소개하는 선교적 복음서다. 설교자는 요한복음만의 특유의 관점을 파악하되, 기록 목적에 부합하는 구약 간본문들을 활용해 구속사적 석의와 설교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 p.40
사도 요한은 맨 먼저 쓴 요한복음을 알고서도 이를 거부한 채 요한공동체에서 이탈한 가현설 이단을 염두에 두고 요한서신을 써야만 했다(요일2:19; 참고. 요 13:30). 그 후 요한공동체 안에 요한의 지도력을 거부한 자들(예. 디오드레베)이 추가로 발생하자, 요한은 요한삼서를 기록했다. 믿음과 진리와 사랑의 공동체 안에 머무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사이자 지식의 원천인 ‘기름 부음(성령님)’이 있지만, 이탈한 자들에게는 없다(참고. 요일2:27; 고후1:21-22). 결과적으로 고름과 같은 이단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빠져나가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가벼워졌다.
--- p.63
마틴 루터는 흑사병이 비텐베르크를 강타했던 시기인 1527년 8월에서 11월에 신명기 강의 대신, 아름답고도 친절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탁월하게 소개하는 요한일서를 가르쳤다(요일3:16 주해에서 흑사병을 언급함). 왜냐하면 슬픔과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참 믿음과 참 사랑(율법이 아닌 복음의 명령)에서 나오는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p.74
요한서신을 석의하고 설교하려면, 무엇보다 기록 목적과 주요 신학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단어들의 관련성과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또한 요한서신의 독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오늘의 상황 사이에 유사점을 정확하게 찾으면 찾을수록 정확한 적용이 가능하다.
--- p.84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재난을 이길 위로와 소망을 발견하고자 할 때, 설교자는 위로와 소망의 책인 요한계시록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계시록을 설교할 때는 계시록 2-3장의 소아시아 7교회를 향한 ‘예언적 신탁 설교’로 설교 본문이 제한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면 이렇게 설교 본문의 편중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설교자가 계시록의 독특한 구조에 담긴 환상과 그 환상을 해석하는 열쇠인 상징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의미와 신학적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 p.105
요한계시록의 방점은 그리스도 사건의 은덕을 힘입어 박해 중에도 전투하며 승리하는 교회에 있다. 그런데 계시록 21장 1-8절을 이상적인 ‘장소’로 보는 뉘앙스를 견지하면서, 반로마적 메시지를 찾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를 고려하여 종말론적으로 설교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미래가 이미 현재에 도래해 있다는 대안 세계를 도출함으로써 악에 저항하도록 만드는 변혁적이며 종말론적인 설교라 할 수 있다.28 그러나 계시록의 마지막 단락인 21-22장에서도 어린양과 그분의 방문을 기다리는 신부라는 인격체, 다시 말해 기독론적 교회론이 공간적 장소에게 무게중심을 양보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p.113
설교자가 요한계시록을 연속으로 강해 설교하려면, 반드시 계시록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설교자는 요한계시록 본문을 석의하는 능력을 향상하도록 계속 애써야 하는데, 특히 묵시-예언-서신이라는 장르적 특성, 반복되는 구조, 기록 목적, 그리고 주요 신학에 익숙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는 ‘석의 안테나(exegetical antenna)’가 높아 요한계시록의 전체 내러티브의 전개 방식과 상호 관련성을 잘 보여주는 양질의 주석을 참고해야 한다.
--- p.13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