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어느 순간 훅, 낯설어지면서 사람을 황야에 내던진다. 하지만 그 슬픔과 삭막함과 고독은 모두 그네를 타는 일이다. 삐걱거리며 흔들리며 바람을 꿈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풀과 꽃과 별이 그네였고, 사람이 그네였다. 분이가 꾸는 모든 것은 그네가 꾸는 은유였다. 새벽달은 그네를 타면서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어쩌면 잠든 사람들도 꿈이라는 그네를 타고 삶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리라. 세상의 모든 것이 그네를 타고 있었다. 나는 바람이다, 나는 바람이다. 망가진 것들이 그네를 타고 있었다.
---「그네」중에서
첨부터 점쟁인 줄 알어? 난 점쟁이가 아니야. 스물여덟에… 다리에 도착했지. 피난에 나선 지… 거의 열 달 만이었제. 목소리는 느리게, 뜨문뜨문 이어졌다. 영도다리에서 만나자는, 약속 때문에… 온갖 죽을 고생에도 영도다리만 생각했지. 얼마나 기다릴까 매일… 마음 졸였지. 그래, 정말 천신만고 끝에 닿은 데야, 이 집이. 없었지… 아무리 찾아도 아무리 기다려도, 그 사람 오지 않았어. 그렇다고 다리를 떠날 수도 없고, 이렇게 영영 못 볼 줄 알았으면 그렇게 기를 쓰고… 이 먼 델 오지도 않았지. 첨부터 점쟁인 줄 알어? 아니야… 너무 배가 고파 점집에서 심부름이나 하다가 곁눈질로 배웠지. 그 점쟁이가 아픈 바람에 대신 말해 주기 시작했고… 그 사람이 죽자, 떠나지도 못하고 고대로, 물려받았지. 뭘 알겄어. 내 입이 말한 건… 모두 기다림이 가르쳐 준 것이지.
---「영도다리 아래에서 물어보라」중에서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머물면서, 되돌아오면서 영이는 시간의 심연에, 진화하는 깊이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겨우 모래를 뚫고 돌아오면 집에도 모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이는 그예 자신이 모래 한 알임을 깨닫고야 말았다.
---「깊이의 진화」중에서
아바나에서 출발해 파나마시티와 리마를 거치는 여정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공항을 나서자 호텔에서 보내 준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택시가 도심 모퉁이 낯선 호텔 앞에 내려 주는 순간, 연이는 택시로부터 버려진,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낡은 가방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선택해 놓고서도 혼자가 되면 늘 잊힌 느낌. 동시에 버려짐에 묻어나는 어떤 안도감과 평안. 여행이란 스스로를 낯선 어딘가에 내다 놓는 일이었다. 유리컵이나 돌멩이처럼 낡은 가방처럼 사물이 되는 것. 그렇게 무심해지는 연습이 여행이었다.
---「환(幻)을 향하여」중에서
인간은 척박한 땅에 태어나면 제일 먼저 기도를 배운다. 경외를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답이었다. 송이가 세상에 던진, 모든 고통과 슬픔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 바깥엔 사막 같은 고원이 이어지고 저만치 높은 설산들이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가없는 척박함 속에서 납작한 집이 한 채씩 나타나곤 했다. 버스를 향해 집 앞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가 없었으면 그 집들은 하나의 모래 더미로 여겨졌을 것이다. 사람이 살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국경」중에서
인어공주가 목소리와 사랑을 잃고 소멸한 줄 알지만, 실은 그 소멸이 모든 시작이었던 거지요. 나는 한 방울 물 알갱이가 되어, 한 잎 거품이 되어, 한 점 먼지가 되어, 한 덩이 얼음이 되어, 한 줄기 물관이 되어, 점점 사랑을 배워 갔답니다. 미완성이 진짜 완성임을 깨달았죠. 사랑을 연습하고, 사랑을 전달하고. 그래서 우주가 사랑으로 그득해지는 것을 상상했답니다. 그 어디까지 흐르면서, 부드럽고 강인하고 눈부시게 성장했지요. 그러면서 바다 왕궁에서 인어공주로 태어난 나의 아름다운 DNA를 이해하게 되었지요.
---「그 후의 인어공주」중에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법으로 가득한지 잘 모르지? 잘 모를 거야. 인간은 제가 잃어버린 게 뭔지 몰라. 계시와 신비와 경외는 다 잃었지. 기계에 길들여지면서. 지금은 그저 무언가를 사고팔고 축적하는 데 몰두하지. 그것이 인생인 줄 알아. 그러면서 마구 앞으로 달려 나가지. 거긴 아무것도 없는데 말야. 죽음 직전에 그 공허를 알고 두려워하지.
---「칠성 전당포」중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주변과 혼을 교류해야 한다. 그것이 ‘본래’였다. 강이는 배 속 깊은 데서 치미는 바늘 끝 같은 슬픔을 감지했다. 인간은 모든 미지의 것들, 그 이질적이고 소외된 것들에게 빚지고 있다. 흙과 물과 공기에 함께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생명을 유지했던 그 본래를 왜 잃었던 걸까.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던 아름다운 춤을 잊었다. 문명은 인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단절시켰다. 울고 싶었다. 지구 시스템 전체를 작동시키는 막대한 문명도 우주 앞에서 사실 얼마나 미세한 먼지인가.
---「나선의 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