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국면이 전환될 때, 혹은 삶이 우리에게 다른 역할과 임무를 부여할 때, 우리는 자아의 변화를 겪으며 페르소나를 바꿔 쓰고 새로운 역할극에 익숙해져야 한다. 거부할 수 없는 변화 앞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너무 크지 않기를, 새로운 사회적 가면이 너무 이질적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 p.8, 「들어가며」중에서
서구의 회화는 문명의 발달과 진화 과정의 시각적 기록이고, 인간의 자아와 인지적 활동이 이루어 낸 성과를 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중세와 근대가 구분되는 시기는 예술이 공공의 영역에서 개인의 영역으로 넘어오던 무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숙한 반에이크의 자아가 눈뜨고 독립 자화상을 제작한 시기가 1400년대 초반, 중세에 속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 p.42, 「얀 반에이크」중에서
완벽주의자였고, 성취를 향해 질주했던 뒤러는 제자들을 위해 저술한 책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과로하기를 삼가라”고 권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충고다. 인류의 위대한 성취는 만족할 줄 모르고 지칠 줄 모르는 수많은 개인들이 최선을 다해 일한 결과의 산물이다.
--- p.65, 「알브레히트 뒤러」중에서
안귀솔라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실력을 연마한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성과의 가장 빛나는 선례를 보여 줬다. 좋은 교육과 실력, 가정의 분위기, 예술가를 우대하는 사회적 조건이 결합된 덕분에 그녀는 16세기라는 시대적 제약과 북부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공간적 제약을 가뿐하게 떨치고 세상의 중심 무대를 향해 비상할 수 있었다.
--- p.88, 「소포니스바 안귀솔라」중에서
지위와 명예, 부, 애써 이뤄 낸 업적, 자신을 수식하던 화려한 타이틀을 모두 내려놓았을 때 인간은 과연 무엇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을까. 렘브란트가 그린 후기의 진지한 그림들은 인생에 관한 이런 질문을 던진다.
--- p.103,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레인」중에서
무엇보다 우리가 고흐의 그림에서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물질에 사로잡힌 시대를 거부하고, 자기 신앙의 순수성으로 현실을 정면 돌파한 그의 우직함, 고독하고 처절하게 예술혼을 불태운 그의 의지와 투지, 그리고 인간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랑과 동경 때문이 아닐까.
--- p.180, 「빈센트 반 고흐」중에서
삶의 고통 앞에서 뭉크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칼로는 덤덤한 표정으로 일자로 맞붙은 눈썹을 보이며 까만 눈으로 고집스럽게 관객을 응시한다. 그녀의 많은 자화상은 고통의 배경을 뒤로하고 의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열어 보이며 묻는다. ‘당신은 괜찮은가’라고.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고. 그 표정을 ‘의연함’이라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 p.230, 「프리다 칼로」중에서
‘자신의 공포와 두려움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때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녀의 예술 철학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분명한 길을 보여 준다.
--- p.264, 「루이스 부르주아」중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는 ‘눈’은 자화상에서 가장 정성 들여 그려지는 부분이다. 삶의 본질을 전하는 렘브란트의 관조적인 눈, 파토스로 가득한 카라바조의 눈, 영웅적 자의식이 넘치는 뒤러의 눈, 내면의 감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내는 실레의 눈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건네는가.
--- p.324, 「귀스타브 쿠르베」중에서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시간을 일구어 가는 과정이다. 삶의 행로란 우울과 환희, 쾌락과 고통, 충만함과 공허함, 기쁨과 슬픔의 양극을 오가는 진자의 움직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심리적 통찰이 필요한 이유는 그 진폭의 리듬과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다.
--- p.353, 「에드바르 뭉크」중에서
결국 실레의 예술 세계는 청소년기 트라우마가 한 청년의 자아 성장에 미치는 영향과 극복 과정이 기록된 성장 드라마다.
--- p.365, 「에곤 실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