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볼가강을 기준으로 세계는 둘로 나뉜다. 볼가강의 왼쪽 강가는 낮고 노랗고 평평하게 펼쳐져 스텝 지역과 맞닿아 있었는데, (…) 강 오른쪽은 높은 산들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끝은 마치 칼로 자른 듯이 반듯하게 수직으로 뻗어서 물속으로 사라졌다. (…) 교사 야코프 이바노비치 바흐는 검은 물결이 몰아치는 볼가강의 정중앙에 있는, 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느끼고 있었다.
--- p.15~16
전쟁은 그 후로도 반년을 더 끌었다. 그해에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기계들이 파괴되고 뭔가 야만적인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바흐는 그해를 ‘광기의 해’라고 불렀다.
--- p.150~151
신앙, 학교, 마을 공동체, 이 세 가지는 그나덴탈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인데, 제분업자 바그너의 집과 가축을 앗아 갔듯이 그들에게서 이 모든 것을 앗아 갔다. (…) 이제 소련이라는 명칭이 붙은 새로운 그나덴탈은 반쯤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사람들은 희망을 상실했으며 가축들은 말라갔다.
--- p.268~269
“내가 그나덴탈에 머무른 수개월 동안 나는 여기 사람들이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어. 하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었지. 그런데 자네 덕분에 이제 알게 되었어…….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을 갈구하는 순진한 아이의 마음. 맞아, 바흐, 자네 말이 천만 번 옳아! 이보다 더 정확할 순 없어…….”
--- p.292
“이렇게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는 도대체 어디에서 영감을 얻은 건가? 너무 정확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야. 나는 이 모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일세! 자넨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셰익스피어야! 더벅머리 실러라고! 그 덥수룩한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건가? 어? 악마라도 들어가 있는 건가?”
--- p.321
『2권』
기억 속에 있는 단어들 중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단어들을 낚아서 한 줄 한 줄, 한 장 한 장 써가면서 그나덴탈의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갔으며, 해가 뜨기가 무섭게 자신의 계획이 어서 속히 실행되기를 원했다. 그가 쓰는 문장은 하나하나가 돌이었다. 그는 모든 문장이 반드시 새로운 생명으로 형상화되고, 모든 돌은 반드시 새로운 삶을 건축하는 데에 사용되리라고 확신했다. 호프만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6
이들은 미래의 영웅들이었고, 그래서 역사는 아직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얼굴 없는 거인들은 (…) 볼가강 유역에 있는 스텝 지역을 걸어 다녔고, (…) 거인의 부츠 아래에서 말들이 계속 죽어나갔다. (…) 하지만 지도자가 자세히 보자 거인의 무거운 부츠 아래에 밟힌 것은 말이 아니라 바퀴벌레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교활한 트랙터 ‘난쟁이’들이었다.
--- p.88~89
바흐는 지금껏 안체를 거대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왔고, 집은 그녀에게 완벽한 안식처였다. 그의 생각이 옳았던 것이다! 그는 아이를 세상 속으로 데리고 나가보려고 했으나 이 시도는 상당히 위험했고 시도만으로도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들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p.160
바시카는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두워서 몸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배에서 쓰는 것같이 튼튼하고 투명한 밧줄과 연결돼 있는 것을 보았고, 이 밧줄들이 사면에서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가장 굵은 밧줄은 노인과 딸이 자는 침실과 연결돼 있었고, 그것보다 가는 밧줄은 서랍장에 있는, 노래가 나오는 상자와 연결돼 있었으며, 그다음으로는 집에 있는 다른 물건들과 연결돼 있었다. 바시카 자신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 한 마리 같았다.
--- p.235~236
집도 바흐도 천천히 그리고 무심하게 늙고 낡아가고 있었다. 둘은 마치 오래된 친구 같았다. 아니, 형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인지도 모른다. 바흐는 이렇듯 자연스러운 우정이 싫지 않았다. 이 둘의 삶이 서서히 꺼져갈수록 아이들의 삶은 더 화려하게 활활 타오를 테니까. 이로써 아이들은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 p.335~336
이 강이 지독하게 잔인하다는 것을? 무기와 마지막 증거들의 무덤이라는 것을? 아니면 반대로 강이 자비로움 그 자체라는 것을? 자신의 물결로 모든 야만적이고 잔인하고 야만적인 행위들을 덮어서 흘려보내고 있기 때문에 이 강은 자비롭고 인내심이 많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일까? 이 강이 거짓투성이라는 것을? 엄청나게 끔찍한 것을 감춘 거짓 아름다움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혹은 그 반대로 강이 진실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단지 두려워하지 않고 두 눈을 뜬 채 강바닥을 걸으며 수 세기 동안 보존해온 순수한 진실을 마주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라고?
--- p.401~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