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을 살아오며 나 스스로 강렬하게 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것을 하고 있는 모든 순간은 가슴속이 뜨거울 만큼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에겐 문예부였고, 그 절정의 순간이 바로 내가 인생 첫 무대에 오르는 오늘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 편이어야 할 사람들에게는 말 한마디조차 꺼내지 못했으니 마음 한편이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축제 현장에는 공연을 하는 학생들의 식구들로 가득했다. 꽃다발을 사 와 응원을 전하며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 모습을 볼수록 나는 애써 괜찮다고 주문을 걸었다.
--- pp.62~63
“어때? 우리 문예부의 부장을 맡아 줄 수 있겠어?”
평소 같았으면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것과 이런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을 피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 나는 그러지 않았다. 문예부 활동을 일 년 동안 하면서 변화가 있었던 탓인지 내 입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할 말을 뱉어 버렸다.
“네, 해 보겠습니다.”
--- p.79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어찌 보면 정말 대단한 일일 수도 있겠다. 나라도 못하는 걸, 어른들도 못하는 걸, 우리 청소년들이 하려고 노력하니까 말이다. 무심코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을 밖으로 꺼내 봤는데 이 말이 차츰 현실이 되어 간다. 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 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날의 마음을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었다.
‘용기를 내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용기를 내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법이니까.’
--- p.114
“그래, 보러 갈게.”
“정말?”
“그래, 마지막이라며?”
어머니 입에서 마지막이라는 말이 나오자 마음이 이상했다.
“응……. 근데 진짜 보러 올 거야?”
“학창 시절 마지막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데, 보러 가야지.”
“정말? 엄마. 고마워.”
“단, 연극 그거 네 말대로 이번이 끝이어야 해. 알았지? 취미는 이번이 마지막이고, 대학 가서 즐기는 거야.”
갑자기 모든 생각이 멈췄다.
--- p.135
마지막 무대 인사를 하는 커튼콜이 진행되자 배우들은 모두 무대 위에 섰다. 관객들은 우리에게 전보다 더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그 순간, 우리 부모님은 어떤지 알고 싶어서 눈으로 부지런히 찾았다. 하지만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뜨거운 눈물이 맺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이 행복이 더 슬프게 다가왔다. 인사를 끝내자 무대는 어두워졌다. 이제 고등학교 시절 마지막 문학의 밤이 막을 내렸다.
--- p.149
“오늘부터 너 과외 시작이야.”
“네?”
“이제 축제도 끝났겠다, 수능 준비 제대로 해야지.”
온몸이 얼어붙었다.
‘아, 그렇구나. 이제 고3이 되니 수능 준비를 해야 하는구나. 내 꿈이었던 문학의 밤은 지금 하면 안 되는 거구나.’
과외를 받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만 들었다.
‘왜 안 되는 걸까?’
‘꿈을 찾았는데 왜 지금은 이 꿈을 향해 걸어가면 안 되는 걸까?’
--- p.166
“너희들의 꿈이 학교 안에서만 갇혀 있는 게 싫지 않아? 학교를 벗어나서 진짜 현장에서 진짜 극장에서 무대에 서 보고 싶지 않아? 대학을 가야지만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꿈. 자기 글을 발표하는 꿈, 자기 연기를 전문 극장에서 선보이는 꿈, 그 꿈을 지금 같이 이뤄 보지 않을래? 바로 여기, 고딩만의 공연 모임에서.”
--- p.181
마침내 공연 시간이 되자 조명이 어두워지고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늘 이 순간이 오면 긴장이 된다. 공연 시작 전 꺼지는 조명, 그리고 어두워지는 세계. 온통 어둠으로 가득해질 때, 가장 조용하지만 내 심장은 가장 떨린다. 하지만 이때가 가장 솔직한 나를 알 수 있는 순간이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내 심장소리를 느낄 수 있는 온전히 순간이니까. 이것을 연극에서는 ‘암전’이라고 한다. 난 그 암전이 좋았다. 암전되었다가 다시 밝아지면 그때부터 연극이라는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 p.228
“아직은 철들 필요 없어. 마음 가는 대로 해야 해. 알았지?”
양호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철이 든다는 것은 어쩌면 현실을 알게 되어, 나한테 주어진 현실에 맞춰 살아간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자기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한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절대 철들지 않을 거야.’
--- p.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