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데 따뜻하고 웃긴데 가끔은 진지한, 우아한 여행 에세이
손민규 (lugali@yes24.com)
2024-01-04
제목이고 주제고 내용이고 보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책을 구매하는 작가가 몇 명 있다. 한 명이 임성순이다. 가장 존경하는 작가 다섯 손가락 안에 무조건 꼽는 분이다. 『극해』를 읽고 팬이 됐고, 발표하는 장편은 다 사서 모았다. 본격 추억 보정 에세이 『잉여롭게 슬기롭게』도 즐겁게 읽었다. 여행 에세이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바로 구매했다. 제목은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 먼 길』이다.
책 표지에는 임성순 작가로 보이는 한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거친 산맥 사이로 난 길을 달리고 있다. 사진 위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유배기이자 귀향을 향해 11,000킬로미터를 돌아가는 한 멍청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별 일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글 쓰는 시간으로 일상을 채우는 저자는 이런 저런 계기로 유럽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마침 등단 10주년이었고, 그보다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낚여 오토바이로 떠나는 세계 여행이라는 아이디어에 사로잡힌다. 우선 동해로 가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오토바이로 시베리아를 횡단해볼까? 아니 그냥 기차를 타자.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내리며, 본격적인 오토바이 여행이 시작된다. 여행의 1차 목표는 알프스 넘기!
오토바이 여행은 괴로웠다. 바람은 애교. 수많은 벌레가 온몸을 때렸다. 한여름 새벽에 운전해 본 사람은 이해할 테다. 동이 트고 번호판에 붙어 있는 거무스름한 사체들의 존재. 내 몸에 그 사체들이 들러붙는다 생각해보라.
곤충보다 더 큰 위험이 작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날씨. 웬일인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마다 비가 몰아쳤다. 겨울로 향하고 있었다. 비구름은 알프스로 오면 눈구름으로 바뀔 테고, 엄청난 눈을 뿌린다. 그렇게 되면, 알프스를 넘지 못한다. 눈으로 도로가 통제될 테니. 여행의 1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비구름보다 빠르게 달려야 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급 '맨 VS 날씨'라는 이상한 형태로 독일을 가로지르는 경주를 치르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 경주 내내 저는 비를 맞죠.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맞은 비는 앞으로 맞을 비의 전주곡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던 거죠. (78쪽)
임성순 작가의 문체적 특징이기도 한 엉뚱하면서 냉소적이고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여행 중에 벌어진다. 오토바이로 속도 제한이 없는 독일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질주하며 아슬아슬하게 사선을 넘나드는가 하면, 말벌에 쏘이고, 크로아티아 플라트비체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에서는 구글 지도에 낚여 길을 헤매다 결국엔 길에서 미끄러지며 다친다.
활자로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여행이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은 다가온다. 스페인에서 대한민국으로 오토바이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즐기는 여행은 프랑스에서 패키지 여행! 버스에서는 자면 되고, 내려서는 관람하면 되는 패키지 여행 만세!
여행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거창한 결말도, 화려한 레드 카펫도 없이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끝나버렸습니다. 어쨌든 모든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끝나는 법이니까요. 다음 여행을 떠나기까지는요. 무언가 아름답고 멋진 교훈을 줄 수 있다거나 거창하게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아쉽네요. 여행이 사람을 바꿔준다거나 자아를 찾아준다거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게 해줄 수 있다고도 합니다만, 적어도 저는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전보다 덜 열심히 살게 됐습니다. 이제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며 하루를 쪼개고 쪼개 글을 쓰는 일은 하지 않게 됐습니다. 불행과 경주하며 스스로의 한계까지 쥐어짜내는 식의 창작도 있겠지만 뭐, 저까지 그럴 일 있나요. (279~280쪽)
엥? 이렇게 여행기가 허무하게 끝난다고? 이런 마무리도 나름 멋있지만, 작가는 여행과 세상에 관한 진중한 메시지를 덧붙인다. 저자는 여행을 하든 하지 않든 바쁘든 바쁘지 않든 현실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해보길 권한다. 세상은 찬란하고, 동시에 슬프기도 하다. 그걸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여행이다. 많은 사람이 여행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나도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오르고 싶어졌다. 알프스는 못 보더라도, 대한민국 설산이라도 가야겠다. 기다려라, 지리산 천왕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