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년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10대 초반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했는데, 그녀가 스무 살에 쓴 『첫인상(First Impressions)』이 개작을 거쳐 출간된 작품이 『오만과 편견』이다. 19세기 초의 계층 구조와 결혼을 둘러싼 사회적 통념을 고려하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여성에게 요구된 수동적인 태도를 거부하고 주체적인 삶을 지향한 엘리자베스는 신데렐라와 거리가 멀었고, “인간이 갈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보다 (당대의 사회적 통념상) 열등한 여성의 비판과 도발을 내적 성장과 변화의 계기로 받아들인 다아시는 ‘백마를 탄 왕자’와 크게 달랐다. 이처럼 등장인물을 통해 구현된 현대성은 자신의 작품을 익명으로 발표해야 했을 만큼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제약을 받은 시대에 작가가 지향한 이상적 인물과 세계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 p.5
베넷 씨는 영민함과 냉소적인 기질, 과묵함과 엉뚱함이 기묘하게 뒤섞인 사람이라 아내가 그의 성격을 이해하기에는 23년의 세월도 충분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이해력이 떨어지고 지식이 부족하며 성격이 변덕스러웠고, 뭔가 탐탁지 않은 게 있을 때는 자신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평생의 과업은 딸들을 결혼시키는 것이었고, 일상의 낙은 이웃집에 가서 잡담을 나누는 것이었다.
--- p.13
“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가 덧붙였다. “워낙 무례하고 불쾌한 사람이라 기분을 맞춰줄 이유도 없고, 그런 사람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리지가 손해 볼 일도 별로 없다는 거죠. 그렇게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인간의 비위를 맞춰줄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어요. 자기가 뭐 대단한 줄 알고 이리저리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 다니던데 같이 춤추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잘 생기지도 않았거든요.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해요. 당신이 그 인간의 콧대를 꺾어줬어야 하는데. 정말 혐오스러운 사람이라고요.”
--- p.22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언니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무도회에서 빙리 씨의 누이들은 참석자들을 두루 배려하지도 않았거니와, 엘리자베스는 언니보다 눈치가 빠르고 덜 순응적이며 누군가의 관심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지도 않은 까닭에 그들을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사실 기분이 좋을 때는 부족함이 전혀 없을 정도로 좋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근사근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매우 훌륭한 숙녀들이라 할 수 있지만, 그날은 도도하고 거만하기만 했다. 그들은 외모가 출중했고 런던의 일류 사립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2만 파운드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수에 넘치게 돈을 쓰고 지체 높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 자신이 모든 면에서 우월하고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 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잉글랜드 북부의 괜찮은 가문 출신이었는데, 이는 그들 남매의 재산이 상업에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보다 그들의 머릿속에 더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 p.24
“오만이라는 건,” 메리가 자신의 견고한 성찰을 뽐내며 말했다. “아주 흔한 결점이라고 생각해. 내가 이제까지 읽은 책들에 따르면, 오만은 정말이지 너무나 흔하고 인간은 본성적으로 오만해지기 쉬워. 사실이 그렇든 혹은 상상에 의해서든 우리 가운데 자신의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기만족의 감정을 품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어. 허영과 오만은 흔히 같은 뜻으로 사용되지만, 이 둘은 다른 거야. 허영이 없이도 사람은 오만해질 수 있어. 허영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관련된 것이라면, 오만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관련이 있거든.”
--- p.29
“참 좋은 계획이네,”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좋은 혼처를 잡겠다는 욕심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면 말이야. 만일 내가 부유한 남편감을 얻기로 마음먹었거나 그냥 아무나 만나서 결혼하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런 계획을 받아들일 거야. 하지만 언니의 감정은 그런 게 아니야. 언니는 미리 정해놓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거든. 언니는 아직 빙리 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과연 그게 합당한 것인지 확신이 없어. 그분을 알게 된 지 보름밖에 안 됐으니까. 언니는 그분과 무도회에서 춤을 네 번 추었고 그분 댁에서 아침에 한 번 만난 적이 있고 저녁 식사를 네 번 같이 한 게 전부야. 그분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아.”
--- p.32
그녀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는데, 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그렇게 이른 시각에, 그렇게 궂은 날씨에, 그것도 혼자서 3마일을 걸어왔다는 사실이 허스트 부인과 빙리 양에게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매우 공손한 응대를 받았다. 하지만 빙리 씨의 태도에는 공손함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으니 바로 반가움과 친절함이었다. 한편 다아시 씨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허스트 씨는 아예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다아시 씨는 오래 걸어서 발그레하게 생기가 도는 그녀의 얼굴에 속으로 감탄하면서도 과연 그녀가 그렇게 먼 길을 혼자 와야 할 만한 상황인지 의아하기도 했다. 허스트 씨는 오로지 자신의 아침 식사만 생각하고 있었다.
--- p.45
“아! 그럴 일은 없습니다. 다아시 씨 때문에 제가 쫓기듯 떠나지는 않을 겁니다. 저를 피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떠나야죠. 서로 좋은 사이는 아니어서 그를 만나는 게 저로서는 고통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제가 그를 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제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그의 됨됨이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무척 안타까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베넷 양,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분이셨고 저에게는 가장 진실한 벗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다아시 씨를 마주할 때면 그 어르신에 대한 따뜻한 기억 때문에 마음이 정말 아픕니다. 그가 저에게 저지른 행동은 수치스럽기 그지없지만, 그가 어르신의 유지를 저버리고 그분과의 추억을 욕되게 하지만 않는다면 저는 그가 저지른 모든 행동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p.97
네더필드의 무도회에 대한 기대는 베넷 집안의 모든 여성을 들뜨게 했다. 베넷 부인은 무도회가 자신의 맏딸을 위해 열리는 것이라고 믿었고, 특히 의례적인 초대장 대신 빙리 씨가 직접 찾아와서 초대의 뜻을 전했다는 사실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제인은 무도회에서 빙리 씨의 배려 속에 빙리 자매와 어울려 행복한 저녁을 보낼 상상을 했고, 엘리자베스는 위컴 씨와 마음껏 춤을 출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다아시 씨의 표정과 행동에서 모든 사실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캐서린과 리디아가 기대하는 즐거움은 어떤 일이나 특정한 사람에 의해 달라질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엘리자베스처럼 그날 저녁 시간의 절반은 위컴 씨와 춤을 추며 보낼 생각이었지만 그가 그녀들을 만족시켜줄 유일한 파트너는 아니었다. 어쨌든 무도회는 무도회답게 여러 사람과 춤을 출 수 있어야 했다. 메리조차도 가족들에게 그 무도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뜻이 전혀 없음을 밝혔다.
--- p.107
다시 춤곡이 시작되고 다아시가 엘리자베스에게 다가오자 샬럿은 그녀에게 아무리 위컴이 마음에 들어도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위가 높은 남자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엘리자베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춤을 추는 무리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다아시 씨와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지위가 높아진 듯한 느낌에 놀랐고, 주위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이들도 똑같이 놀라고 있음을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춤을 두 번 추는 동안 그들이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침묵을 깨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문득 어쩔 수 없이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이 그를 더 괴롭히는 방법이라는 생각에 춤에 관한 이야기를 몇 마디 건넸다. 그는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 p.111
희망은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다. 제인은 편지의 나머지 부분을 다시 읽어 보았으나 글쓴이의 허울뿐인 우정 말고는 위로가 될 만한 내용을 거의 찾지 못했다. 편지에는 다아시 양에 대한 찬사가 가득했다. 그녀의 여러 가지 매력을 다시 한번 상세히 적은 이 편지에서 캐롤라인은 다아시 양과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고 자랑하면서 앞선 편지에서 이야기한 소망이 실현될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그녀는 오빠가 다아시 씨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고 다아시 씨가 집에 새 가구를 들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뜬 기분으로 언급했다. 편지의 주요 내용을 언니로부터 전해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분노를 삭였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언니가 걱정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주변 인물들에게 화가 났다. 자기 오빠가 다아시 양을 무척 좋아한다는 캐롤라인의 주장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없었다. 빙리 씨가 언니를 진정으로 좋아한다는 믿음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늘 좋게 생각했던 것만큼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며 그들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자신의 행복을 저버리고 있는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부족한 결단력에 화가 났고 거의 경멸감이 들기까지 했다. 그가 자신의 행복만 저버리는 것이라면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즐기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여기에는 언니의 행복도 관련되어 있었고 빙리도 그것을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이 문제는 오래 붙들고 생각한들 뾰족한 해결책이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빙리의 사랑이 식은 것일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의 간섭 때문에 억눌려 있는 것일까? 빙리는 언니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어쩌면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냐에 따라 빙리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어떤 경우든 언니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상처받은 마음은 평정을 잃지 않을 수 없었다.
--- p.158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그렇게 묘사하는 그의 말에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피츠윌리엄 대령에게 말했다. “대령님의 사촌께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려주실 거예요. 제가 하는 말은 한마디도 믿지 말라고 말이죠. 저의 본모습을 이처럼 잘 폭로할 수 있는 분과 이렇게 한자리에 있게 되다니 저도 참 운이 없네요. 이곳에서는 좀 괜찮은 사람으로 비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말이죠. 다아시 씨, 하트퍼드셔에서 알게 된 저의 약점을 이렇게 언급하시다니 정말 야박하시네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큰 실수를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제가 복수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여기 계신 친척분들을 깜짝 놀라게 할 그런 얘기를 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 p.203
엘리자베스는 로징스 파크의 대정원을 거닐다가 몇 차례 다아시 씨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평소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책로에서 그와 마주치고는 운도 참 없다고 생각했고,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와 처음 마주친 날 그곳이 자신이 즐겨 찾는 산책로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그와 다시 마주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났고 심지어 그들은 세 번째 마주치기까지 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의도적인 심술이거나 자발적인 고행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그는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다가 어색한 침묵 끝에 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던 길을 돌아서서 그녀와 같이 산책할 필요가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일부러 말을 꺼내거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 번째 마주쳤을 때 그녀는 그가 이상하면서도 두서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헌스퍼드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는지, 혼자 산책하기가 어떤지, 콜린스 씨 부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해 보이는지 물었고 로징스 파크를 언급하면서는 그 저택에 관해 아직 모르는 게 많을 거라며 그녀가 언제든 켄트를 다시 방문할 때는 로징스에 와서 묵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적어도 그의 말은 그렇게 들렸다. 그는 피츠윌리엄 대령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만일 그의 말에 어떤 의도가 있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저택에서 그녀와 피츠윌리엄 대령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다소 곤혹스러웠을 때 목사관 맞은편 울타리의 출입문에 이르게 된 것을 그녀는 무척 다행으로 여겼다.
--- p.211
다아시 씨가 편지를 건넸을 때 엘리자베스는 그가 다시 청혼하는 것은 아니리라 추측했을 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이 그러했으니 그녀가 편지를 얼마나 심각하게 읽어내려갔을지, 얼마나 모순된 감정을 느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편지를 읽는 동안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가 해명할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놀라웠고 그래 봐야 해명다운 해명은 내놓을 수 없으리라 확신했으며 염치가 있다면 그런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강한 편견을 가지고 네더필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그의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읽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그녀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고 다음 문장이 궁금해져서 눈앞에 있는 문장의 뜻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언니가 빙리 씨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는 대목에서는 즉각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단정했고, 그가 그 결혼에 반대한 진짜 이유를 설명한 대목에서는 너무 화가 나서 그의 말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그녀가 수긍할 수 있는 유감을 표하지도 않았다. 문투에는 후회는커녕 도도함만 보였다. 편지에는 오만과 무례만 가득했다.
--- p.235
숲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잠시 강에서 멀어져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숲의 빈터에 이르자 아름다운 경관의 계곡과 산림이 우거진 맞은편의 언덕 그리고 강줄기가 시야에 드문드문 들어왔다. 가드너 씨는 대정원 전체를 보고 싶다며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지 궁금해했다. 정원사는 미소를 지으며 대정원의 둘레가 10마일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로써 궁금증은 해소되었고 그들은 이미 나 있는 순환로를 따라 걸었다. 조금 더 걷자 경사진 숲을 따라 내리막이 시작되었고 그 길은 강폭이 가장 좁은 지점의 물가로 이어졌다. 그들은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소박한 모양의 다리를 건넜다. 그곳은 그들이 지나온 어느 곳보다도 사람의 손길이 덜 닿은 듯했고 폭이 좁아진 계곡에는 좁은 산책로가 강기슭의 거친 관목숲 사이로 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구불구불한 그 산책로를 계속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이 다리를 건너 저택에서 꽤 멀리까지 왔을 때 평소에도 오래 걷지 못하는 가드너 부인은 더 걷는 것을 힘들어하며 그저 마차가 있는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조카는 그런 외숙모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일행은 강 건너편의 저택 쪽으로 가기 위해 가장 가까운 길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낚시를 무척 좋아하면서도 평소 즐길 기회가 많지 않았던 가드너 씨가 물속에서 이따금 송어가 보이자 정원사와 낚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려 걸음의 속도가 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던 그들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다아시 씨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랐고 엘리자베스 역시 앞서 그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반대쪽보다 시야가 트여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놀라기는 했지만 적어도 앞서 만났을 때보다는 그를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고, 그가 정말 그들을 만날 생각으로 오고 있는 것이라면 태연하게 행동하고 침착하게 말하리라 다짐했다. 사실 엘리자베스는 그가 다른 길로 빠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는 길이 굽어진 곳에서 그의 모습이 잠시 가려져 있던 순간에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퉁이를 돌아 곧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의 정중한 태도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한눈에 알아차린 엘리자베스는 그의 깍듯함을 그대로 본떠서 대정원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에 들고’와 ‘매력적’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순간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펨벌리에 대한 칭찬이 의도와 다르게 해석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낯빛이 바뀌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288
감사와 존경이 사랑의 좋은 토대가 될 수 있다면 엘리자베스의 감정이 변한 것은 이상하거나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대를 처음 본 순간 시작되었다고 흔히 묘사되는 사랑과 비교하여 감사와 존경에서 비롯된 사랑은 비상식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면, 위컴에 대한 호감으로 시작된 전자의 방식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보다 덜 흥미로운 후자의 방식으로 사랑을 찾게 되었다는 설명 말고는 그녀를 옹호할 방법이 딱히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다아시가 떠나는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았고 리디아의 추문이 가져올 결과를 예감하며 그 일을 더욱 고통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그녀는 언니의 두 번째 편지를 읽은 뒤 위컴이 리디아와 결혼할 의향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렸다. 아직도 그런 희망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을 듯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놀랄 것도 없었다.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이 머릿속에 있는 동안에는 그녀도 온통 놀란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위컴이 돈이 없는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리디아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런 성격의 애정 관계라면 리디아에게서도 충분한 매력을 발견할 만했다. 엘리자베스는 리디아가 결혼할 의향 없이 도피 행각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동생의 도덕관념이나 분별력으로는 누군가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는 것을 피하지 못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 p.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