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롭지만은 않은 유년 시절의 일대기
저자는 『기찻길 옆 불란서 양옥집』에서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며, 과거의 풍경을 기록하고 채록된 사연들을 술술 풀어낸다. 그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묻기보다는,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는지에 중점을 둔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과거를 생생하게 기억해 내는 저자는, 다른 사람은 알 길 없는 자신만의 내밀한 과거를 드러내는 데 만족하기보다는, 이 책의 독자들 역시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작업에 기꺼이 동참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는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낸 후, 이를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연결시키는 능력을 지닌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이다.
기억, 공간 속에서 정박되다
저자는 장소와 풍경에 머물던 사람들의 곡진한 사연보다는 그곳에 자리 잡은 풍경과 사물에 더 자주 눈길을 주는 것 같다. 이를 두고 요새 유행하는 인간과 비인간 주체의 결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제안일지 모른다. 이 책이 안겨다 주는 진정한 즐거움은 다른 곳에 있다. 책을 읽다가 지금의 상황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변했음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게 된다. J읍의 풍경도 변화했을 것이고, 90년대 초반에 저자가 활보하던 소공동과 종로 일대의 거리도 변모했다. 어디 그뿐이랴. 공간에 관한 저자의 기억, 의식, 관념, 태도도 마찬가지로 변화했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면, 사회가 변하는 만큼 기억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곧 변화무쌍한 기억의 흐름을 고정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공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저자는 여전히 불란서 양옥집, J읍 시내, 90년대 초반의 소공동 일대 등에 사로잡혀 있다. 궁극적으로 『기찻길 옆 불란서 양옥집』은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흐름이 특정한 장소 속에서 어떻게 정박되는지 기억하려는 책이다.
- 하승우 (한예종 영상이론과 교수)
지나온 시절과 소소한 경이
누군들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이해하고 때로는 음미하고 싶지 않을까? 저자는 71년생으로 90년대 초까지의 사적인 동시에 알고 보면 어느 세대의 것인 경험을 돌아본다. 어쩌면 저리 잘 기억하지? 세세하고 생기 넘치는 기억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70, 80년대의 경험이 어느새 회상하고 기록할 만한 과거가 되었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럽다. 90년대 이후에 태어났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시절의 맛과 공기와 생활질서와 구경거리들, 그것이 이미 꽤 먼 과거가 아니면 무엇일까!
온갖 것에 대한 호기심과 천진한 선망 그리고 적극성을 지닌 아이였던 저자가 기억해 낸 ‘칠공팔공’ 시절의 일화들을 읽노라면, 아 그랬지, 그 시절엔 그런 게 있었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나, 하는 내적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나도 기억하는 일들이 있어, 이야기하고 싶다는 기분에 젖게 된다. 이 책은 어쩌면 그렇게 막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에서 출발한 것은 아닐까? 원고를 읽다가 저자에게 전화를 걸어 ‘나도 어쩌다 생각나면 참 이상하더라고요. 서울인데도 길거리에 소와 말이 다녔다는 게!’라고 수다를 떨곤 했다.
70년대 경제발전에 발맞추어 대거 보급된 바 있는 불란서 주택에서 ‘불란서’란 20세기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선망의 목록 가운데 한 대상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유일했던 어떤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빛바래고 ‘그 시절의 것’으로 낯설어진다. 돌아보면 ‘양옥집’은 이제는 조금 촌스럽게 느껴지고 레트로한 취향의 대상으로 애틋해진 무엇이다. 이 책에 실린 숱한 사물들이 같은 처지에 있다. 그땐 그렇게 괜찮았던 옛 사물을 저자는 그런데, 오늘의 시선이 아니라 당시의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따뜻해진다.
저자는 이 책에 ‘사적 문명기’라는 부제를 붙였다. 문명이라니! 언제 저자가 비문명인이기라도 했던가? 다분히 과장된 낯설게 하기이다. 성장기의 기억을 사적인 톤으로 서술하며 그것을 ‘신문물’의 체험기라고 명명함으로써 이 책은 특별한 성격을 얻는다. 저자는 어린 마음으로 접한 다양한 사물의 경이로움을 되살린다. 사회학적 조망 대신 다정하고 소소한 일상 사물들의 기억을 통해 ‘지나온 시절’의 작은 흥분들과 소망을 되살려 전하는 것이다.
70, 80년대의 한국은 거시적으로는 경직되고 억압적인 국가, 사회였다. 이 책은 그런 체제의 잿빛 지붕과 울타리 안에서도 훼손되지 않는 생기를 품고 성장한 어느 마음의 따뜻한 기억일 것이다. 그런 것을 잃지 않으려는 개인들의 삶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여느 마음들이 알아볼 것이다.
이 책의 독자는 누구일까? 누구여야 가장 적당할까? 필자처럼 이미 알던 것을 상기하는 독자도 계실 터이고 살지 않은 시절을 건너다보게 된 독자도 계실 것이다. 어느 편이든 이제 자신의 이야기 나누고픈 기분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 조원규 (시인, 문예지 『베개』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