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선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의 정당성은 선거 승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기업가의 행동 동기를 이윤 추구와 이윤 극대화로 설명한다. 실제로는 정치인도 비슷하다. 정치인의 행동 동기는 선거 승리와 득표율 극대화인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것은 기업가가 이윤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각종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처럼, 정치인도 선거 승리를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각종 부작용이 발생한다.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기업가를 ‘위대한 기업가’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선거 승리만을 추구하는 정치가를 ‘위대한 정치가’로 볼 수는 없다. 좋은 정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선거 승리를 중요하게 고려하되, 좋은 나라를 만들려는 열정과 능력, 유능한 팀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 p.7, 「책을 펴내며」 중에서
2022년 3월 9일 대선이 있었다. 윤석열 후보는 48.6%, 이재명 후보는 47.8%를 받았다. 윤석열 후보가 0.7%포인트, 24만 7,077표 격차로 승리했다. 역대 최소 표차였다.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에는 두 유령이 떠돌았다. 하나의 유령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 유령이다. 0.7%포인트 격차는 역대 대선 중 가장 적은 표차다. 졌잘싸 유령은 이재명 후보 입장에서 좋아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잘했졌(잘했지만 졌다)’ 유령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말에도 30% 후반~40% 초반의 지지율을 유지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았다. 잘했졌 유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 입장에서 반길 만한 내용이다. 두 유령으로 인해, 민주당은 ‘대선 패배 원인이 없는’ 정당이 됐다. 실제로 민주당은 공식적으로 대선 평가를 생략했다. 민주당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대선 평가를 하지 않은 유일한 경우다. 민주당은 그냥 어쩌다 보니 패배했을 뿐이다. 87년 이후 8번의 대선이 있었다. 양자 구도인 경우, 역대 대통령들은 중도확장 노선을 통해 당선됐다. 윤석열 후보의 중도확장은 매우 미흡한 수준이었다. 민주당이 윤석열 후보의 당선을 반성해야 하는 이유다.
--- p.21-22, 「1부 가슴이 너무 뜨거워지면 상대방 선거운동을 도와준다」 중에서
2006년 5월 31일, 지방선거가 있었다. 열린우리당은 16개 광역단체장 중 15곳에서 패배했다. 당시 서울시장 투표 결과가 흥미롭다. 한나라당 후보는 오세훈, 열린우리당 후보는 강금실이었다. 오세훈 후보의 압승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 대 개정의 여론 비율과 서울시장 후보였던 오세훈 대 강금실의 득표율 비율이 매우 흡사했다는 점이다. 최종 득표율은 오세훈 61%, 강금실 27%였다. 국가보안법 개정 찬성은 62%였고, 폐지는 22%였다.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의 패배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2004년 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한나라당 선거운동을 도와준 것’으로 귀결됐다. 당시 노무현 정부, 열린우리당, 민주노동당, 진보 언론, 진보계열 시민사회단체, 진보계열 노동조합이 다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서 한나라당을 도운 것이다.
이때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던 진보계열 시민사회단체들과 2018년 최저임금 1만 원의 조속한 실현을 주장했던 단체들은 대체로 일치한다. 가슴이 너무 뜨거운 것도, 실수의 내용, 실수의 결과도 비슷하다. 견해의 다름을 ‘불의한’ 주장으로 간주한 것, 정치적 차별화를 위해 ‘선명한 진보’에 집착했던 패턴도 동일했다.
--- p.41, 「1부 가슴이 너무 뜨거워지면 상대방 선거운동을 도와준다」 중에서
세금을 걷는 것 자체는 불가피하다. 부자가 세금을 더 내는 것은 자유주의 경향이 강한 미국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너무 단기간에, 너무 명분 없이, 너무 많이 걷는 것은 부당하다는 점이다. 필요한 증세는 해야 한다. 그러나 증세 자체를 당연시하는 태도는 반성해야 한다. 서구의 자유주의 혁명이 조세 저항에서 비롯된 것처럼, 한국 정치사에서도 증세의 정치학이 작동했었다.
--- p.84, 「2부 종부세는 ‘정권 교체 촉진세’였다」 중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전 세계 그 어떤 나라에서 불과 4년 만에 세금을 14.7배 올리는 사례가 있을까? 서울 지역 아파트의 24.5%가 종부세 대상자가 됐다. 너무 많은 세금을, 너무 빨리, 너무 부당하게,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걷었다. 문재인 정부에 참여했던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 민주당의 전략가들, 정책 결정자들이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결정한 것이라면, 그 역시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 사람들은 정무적으로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십중팔구 본인들도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르고 결정했을 것이다. 진보세력 전체 분위기에 휩쓸려서, 진보적 열정이 너무 충만해서,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많이 때려도 된다고 생각해서, 세금을 올려서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는 사명감에 충만해서, 혹은 별 생각 없이, 민주당에게 ‘가장 불리한 정치 지형’을 만든 사람들이다. 결과적으로, 상대방 선거운동을 도와주었다.
--- p.112, 「2부 종부세는 ‘정권 교체 촉진세’였다」 중에서
원래 한국 정치는 보수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2018년 지방선거 압승 이후, 이제 진보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소위 ‘유권자 재정렬(Realignment)’ 담론이다. 민주당의 적극 지지층과 진보 성향 유권자들 입장에서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주장이었다. 결과적으로 유권자 재정렬 담론은 민주당에 독이 되었다. 문재인 정부, 민주당 국회의원들,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이 자신들이 세상의 다수가 된 것인 양 착각해버렸기 때문이다.
유권자 지형을 어떻게 파악하는지에 따라 정치적 태도는 달라진다. 정치노선도, 입법 행태도 달라진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후보는 김종필과 단일화를 했다. DJP 연합이다. 김대중 후보가 DJP 연합을 한 이유는 한국의 정치 구도가 보수 우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수와 손을 잡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2002년 노무현 후보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했다. 역시 한국 정치를 보수 우위 구도로 봤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강한 진보 성향의 정책을 폈다. 부동산 정책, 소득주도성장론, 최저임금 1만 원, 탈원전 정책 등이 그러하다. 정치 구도를 진보 우위로 읽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이처럼 정치 지형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정치적 태도, 정치노선, 주요 정책 어젠다, 입법 행태가 모두 달라진다.
--- p.157-158, 「4부 역대 선거 결과로 보는, 87년 이후 정치 구도」 중에서
촛불연합은 왜 해체되었나? 수박들(민주당스럽지 않은 중도 유권자들)이 실망하고 민주당을 떠났기 때문이다. 수박들은 왜 민주당에 실망했을까?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멜론만 편애하
는 정치를 하고, 멜론만 편애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민주당은 수박을 대부분 내쫓았다. 민주당은 다시 ‘순수 멜론당’이 됐다. 그 결과물이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이다. 민주당이 국민의힘 계열의 장기 집권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수박을 타도하고, 순수 멜론당 노선을 고집하는 것이다. 선명하고 진보적인 고립 노선을 취하면 된다. 이것은 51% 연합을 스스로 포기하는 선택이다.
--- p.196, 「5부 민주당 정부는 촛불연합을 어떻게 외면했는가?」 중에서
중도의 실체는 ‘가운데’ 위치하는 유권자가 아니라, 소극적 지지층과 스윙 보터다. 20대 남자 역시 ‘스윙 보터’의 일부였다. 2022년 대선의 경우, 이준석이 주도한 여성가족부 폐지와 안티 페미 정책은 20대 남자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게 만드는 ‘중도 정책’으로 작동했다. 같은 원리로, 2022년 대선 막판에 민주당 박지현의 ‘사이버 성폭력 근절’도 20대 여성표를 땡기는 중도 정책으로 작동했다. 즉, 안티 페미 정책도 중도 정책일 수 있고, 페미 정책도 중도 정책일 수 있다. 중도적인 것과 급진적인 것은 반대되는 개념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 p.254-255, 「6부 한국 정치, ‘진보 우위 시대’는 끝났다」 중에서
현재 민주당에는 ‘초대박 압승론’이 팽배해 있다. 당지도부 판단도 크게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민주당에 우호적인 정치 유튜버, 정치평론가들의 분석이 대동소이하다. 선거제도와 관련해서 ‘연동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 연동형의 논거 중 하나가 ‘지역구 초대박 압승론’일 정도다. 이들은 지역구에서만 민주당이 150~160석을 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민주당을 휘감고 있는 초대박 압승론의 기운은 ‘달콤한 마약’이 되어 혁신과 중도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 p.292, 「6부 한국 정치, ‘진보 우위 시대’는 끝났다」 중에서
총선의 3대 기조는 첫째, 감나무 전략이 아닌, 혁신 전략이어야 한다. 둘째, 중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공략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도는 소극적 지지층과 스윙보터다. 세대로는 2030, 지역은 수도권과 충청이 특히 중요하다. 셋째, 혁신과 중도확장의 본질은 약점 보완이다.
중도확장을 위한 캠페인은 일곱 가지 액션 플랜이 중요하다. 첫째, 리더십을 교체해야 한다. 이재명 대표는 사퇴하고 비대위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 혁신 공천에 앞서 3선 이상 수도권 중진들의 고향 출마가 바람직하다. 스윙 지역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행동이다. 하기에 따라서 당선 가능성도 존재한다. 셋째, 비호감 정치인의 공천 배제가 추진되어야 한다. 단, 그기준은 ‘중도의 눈으로’ 볼 때, 비호감이어야 한다. 넷째, ‘민주당스럽지 않은’ 사람의 영입 및 공천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글로벌 대기업과 혁신형 스타트업의 임원들을 30명 정도 영입해서 공천하는 것이다. 이들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진취적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다섯째, ‘민주당스러운’ 사람의 영입 및 공천이다. 특히 업계 전문가를 포함한 에너지 전환 전문가들의 영입이 가장 중요하다. 여섯째, 정책 혁신이다. ‘민주당스럽지 않은’ 정책을 공약하는 게 중요하다. 타다금지법 공개 사과, 전략산업에 대한 법인세 인하, 종부세 폐지+재산세와 통합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곱째, ‘민주당스러운’ 정책을 공약하는게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정책전문가들을 영입하는 게 중요하다.
--- p.337-338, 「7부 2024년 총선에서 승리하려면: 3+7 전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