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주요국들은 지역어를 창안하여 경계를 획정하고, 구별 짓기를 시도해 자국에 유리한 전략공간을 조성하고 경쟁한다. 이는 상대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게 아니라 특정 공간에 가두거나 배제함으로써 의도를 규율하는 일종의 구조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경우, 공간에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비로소 지역이 성립되고 통용된다. 인도-태평양이라는 이름이 하나의 지역 개념으로 성립하려면 특정한 공간적 일체성이 형성되어야 한다. 예컨대, 인도-태평양을 태평양과 인도양이라는 두 대양(大洋)의 연결로 정의한다면 이 공간을 ‘해양’이라는 공통적인 개념을 이용해 규정한다는 뜻이다. 이 경우 해양 세력인 미국과 일본, 호주, 인도네시아 등은 자연스레 공간의 중심에 서게 되고, 역사적으로 유라시아대륙의 중심에 자리한 중국이나 러시아는 주변적 지위에 놓이며, 대륙과 해양이 교차하는 반도와 해협에 위치한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 다수는 중간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개념 전파의 주도국이 되는 반면 중국은 인도-태평양 개념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열망하는 중국몽(中國夢)을 견제하는 기제로 작동할 것이라고 보고 이를 비판하며 대항개념을 찾고 있다. 이처럼 주도 세력은 공간 개념을 이용하여 자기의 정치적·사회적 행위를 통제하고 타자를 구별하고자 한다. 반면 이로 인해 변화된 자국의 위상이 현실 혹은 미래의 열망과 괴리가 있다고 느끼는 세력은 이에 저항하고 갈등을 조장하며 대안(=대항 개념)을 제시하려 한다. 이른바 ‘개념전쟁’의 시작이다.
--- p.15~16
서양의 개념어인 태평양의 수용은 바다와 문명에 대한 인식의 근본적인 변환을 요구했다. 중화와 화이질서의 세계관은 바다와 섬을 교류와 팽창이 아닌 방어의 개념으로 인식하였고 서양의 세계지도를 도입하였을 때도 중국, 일본, 한국 등은 바다가 아닌 대륙에 집중했다. 이른바 오대주설과 천원주방설, 지구설을 둘러싼 논쟁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19세기 들면서 해양을 통해 통상과 군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매개로 한 구미세력의 침투가 이루어지자 비로소 해양을 장악하고 활용해야 하는 경쟁공간으로 자각하게 됐다. 이들은 바다를 장(場)으로 하는 신문명과의 본격적인 만남을 시작했고, 이런 맥락에서 태평양 개념을 받아들였다. 태평양이 국제 정치적 개념으로 등장한 계기는 해양을 통해 서진(西進)을 거듭하며 열강의 일원으로 부상한 미국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산업혁명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한 미국은 서부 연안의 본격적 개발과 함께 잉여 공업생산품과 농산물의 수출시장으로 아시아를 주목했고, 무역로로서 태평양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 p.64~65
아시아-태평양 개념은 냉전이 해체되고 다국적기업을 첨병으로 초국적 공급망을 구축하는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이런 흐름을 주도하는 세력에 의해 성립되고 전파됐다. 일본과 호주가 개념 형성에 기여하였지만 결정적 행위자는 역시 미국이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상품, 서비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자유시장 이념과 가치를, 그리고 그 상부구조로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전 세계에 전파한다는 지구전략을 지역적 영역에서 실천하는 아시아-태평양 개념을 적극 활용했다. 그 핵심 기구인 APEC을 통해서 WTO 등 국제기구와의 정합성을 강조하고 ‘열린 지역주의’ 원칙을 제시하며 역내 국가들의 광범위한 경제 자유화를 추진했다. 아시아-태평양의 중심 개념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인 것이다.
--- p.157~158
동아시아라는 지역어는 일본을 필두로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등 네 마리 용으로 불리는 산업화 성공신화로 인해 본격적으로 회자됐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OECD 국가 성장률의 2배를 기록하면서 경제 기적을 이룩했고, 1970-1980년대 한국과 타이완 등이 신흥공업국으로 불리며 수출주도형 산업화로 눈부신 성장을 거두었다. 세계은행의 1993년 리포트는 이러한 성과를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불렀다. 이들은 단순히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공통점을 넘어 특정한 제도적 특질을 공유하고 있다고 인식됐다. 동아시아의 탁월한 경제 성장은 시장 친화적 경제정책, 거시경제에 입각한 안정적인 관리와 인적자원 투자, 그리고 국가의 선택적 시장 개입(산업정책)의 결과란 것이다.
--- p.165~166
여느 새로운 개념들이 그렇듯이 이 개념도 등장과 함께 여러 비판적 의견이 개진됐다. 첫째, 인도-태평양이라는 개념이 두 대양을 너무 인위적으로 합쳐놓았다는 비판, 둘째, 지나치게 중국을 봉쇄하려는 미국의 계략이라는 비판, 셋째, 너무 광범위한 공간을 포괄해 피상적이며 지리적 공통성과 일관성이 없어 전략의 근간을 제공하는 지역으로 성립되기 어렵다는 비판, 넷째, 국가들 간에 인도-태평양이라는 지역을 지칭하는 개념이 상이하여 일관된 전략적 목표를 도출해내기 어렵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미 인도-태평양은 아시아-태평양을 대체하는 지배적 지역어로 부상했다. 현재 이 지역 개념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주요 국가는 중국, 러시아, 북한에 불과하다.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2010년대 초반과 대조적으로 10년여가 지난 현재 이 용어는 본격적으로 유통되고 있다. 그 연유는 지극히 전략적이다. 이 용어가 지역어로 급부상하게 된 것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유통했기 때문이다.
--- p.218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견제하려는 미국, 일본, 호주, 인도가 인도-태평양 개념을 정의하며 공간을 구획하려는 경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시대 흐름에 비추어 보면 한국은 한반도와 동북아 공간에 매몰되어 있었다. 2017년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내용도 모호한 ‘동북아 플러스 책임 공동체 구상’을 내놓았고, 러시아를 겨냥한 신북방정책을 야심차게 띄웠다. 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러시아 극동 지역, 극지, 북극항로 개발 등을 내세웠으나 이는 사실상 한반도 중심 사고에 그쳤다. 즉, 북한 문제를 풀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 등 북방 지역을 활용한다는 계산에만 경도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신북방정책과 쌍을 이룬 신남방정책은 아세안과 인도를 겨냥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3P 즉 사람(people), 번영(prosperity), 그리고 평화(peace)라는 원칙을 내걸고 아세안 및 인도와 거리를 좁히는 협력에 자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국 다음으로 큰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며 중국 시장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내재된 경제적 목적의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백영서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은 ‘한반도 민족주의’에 빠져 있었다. 신남방정책은 동남아를 주 전장으로 하는 ‘인도-태평양 대 아시아-태평양’ 구도의 개념전쟁에서 유리됐다. 그 결과 신북방정책 이니셔티브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조용히 폐기됐고, 신남방정책은 미국의 인태전략과 접합점을 찾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인도-태평양 개념의 수용 여부가 미중 대립의 장으로 변질되는 속에서 한국은 미국의 인태 개념을 추수(追隨)할 것인지, 기존의 미중 등거리 외교 스탠스를 견지할 것인지 두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했다.
--- p.268~270
한국이 근대 세계에 진입한 이래 오랫동안 접해 온 아시아, 동아/동아시아, 동북아시아라는 세 개념과 달리 인도-태평양의 개념사는 아직 일천하다. 윤석열 정부가 이를 지역 개념으로 수용했다면 향후 과제는 인도-태평양이라는 이 넓고도 낯선 공간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익숙한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국력의 신장과 함께 국익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한반도라는 경역 혹은 한반도 주변을 포함하는 동북아라는 경역을 넘어서 전략공간을 보다 넓게 활용하자는 명분은 충분히 통용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도-태평양으로 자리매김하려면 공간 획정의 논리와 그로 인한 국익에 대한 논리는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채로 제시되어야 한다.
--- p.305
한국은 일단 인도-태평양이라는 지역어를 채택했지만 이 공간을 능동적이고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적절한 개념을 부여하고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미국은 가치와 이념을 기준으로 공간 구획을 시도하며 중국을 견제하고자 하는 반면, 인도와 아세안은 대중 견제 성격을 희석하여 포용적이고 실용적인 개념을 내걸고 있으며 일본과 호주는 그 중간에 위치하여 영향력 증대를 위한 개념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결코 늦지 않았다. 개념전쟁의 수용자(follower)가 아니라 후발 주자(late-comer)일 뿐이다. 한국이 주체적으로 개념경쟁에 나서려면 과거의 체험과 미래의 기대 지평 사이에서 현재 한국이 놓인 세계 질서의 지속과 변화를 바로 보고 그 속에서 지역의 집합적 이익과 자국의 이익 간 연계를 본격적으로 모색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 p.317~318
한국이 인도-태평양 개념 도입에 주저한 주된 이유는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 인접 국가를 활용하려는 한반도중심주의 혹은 한반도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있다. 이미 경제대국이자 선진국으로 발돋움한 한국의 국익은 한반도 주변을 넘어 지역적으로 폭넓게 걸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역 개념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라는 협소한 지리적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이 인도-태평양을 전략공간으로 설정하는 경우, 국내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제시돼야 한다. 그간 친숙했던 공간 개념인 동북아와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태평양을 접고 인도-태평양을 추진한다면 과연 어떤 논리가 필요한가. 그 논리가 미국과 일본 등 주요국의 전략을 추수하는 것이라면 인도-태평양은 여전히 낯선 지역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한국의 주체적 시각이 투영된 개념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 p.322~323
한국은 선진 중견국이다. 경제적·군사적·영토적 덩치로는 강대국이 되기 어렵지만 산업이나 기술 차원에서는 고도의 인적자원과 세련된 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선진국이고 대중문화 면에서는 신흥강국이다. 이렇듯 높아진 국제적 위상과 이에 비례해 다면화된 국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한편에 기대어 이득을 보거나 중립을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 발상을 넘어서야 한다. 인도-태평양이라는 지역공간을 활용하여 강대국의 세력권 경쟁과 협조(concert)가 초래할 위험 요소를 관리하고 협력적이고 민주적인 지역질서를 건축하려는 꿈을 가져야 한다.
--- p.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