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여름(광명전국신인문학상 대상 수상작)
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 우물 안에서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듯, 붕대 테두리 안에서 병실 형광등을 보고 있다. 팔과 다리는 로봇처럼 경직되었다. 그나마 손톱 부분이 붕대 밖으로 나와 있어서 가까스로 움직인다. 순간, 옷을 자르던 가위가 떠올랐다. 스으윽 소리를 내며, 불에 탄 반소매 블라우스와 바지가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머릿속에서는 얼른 손으로 몸을 만진다. 하지만 정작 나의 손은 붕대 안에서 그대로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에 감긴 것이다.
“통증이 심하면 말하세요. 진통제가 들어가긴 하지만 아플 거예요.”
미라에게 호흡이라도 불어넣듯 간호사의 목소리는 상냥하다. 간호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그 말을 낚아챈다. 바늘로 찌르듯 욱신거린다.
“으윽! 아파요.”
“그러면 진통제 버튼을 이렇게 한 번 누르시면 돼요.”
간호사는 내 눈앞까지 버튼을 들이댄다.
“그래도 당분간은 아플 수 있으니까 정말 못 참을 때만 누르세요.”
상냥하던 목소리는 교관처럼 바뀐다. 간호사는 내 엄지손가락 끝을 진통제 버튼 위에 올리더니, 잘 견뎌야 한다는 듯 살짝 누른다. 나는 대답 대신 미간을 찌푸린다. 붕대가 내 미간을 가리고 있어도 간호사는 알아차린 듯하다. 살짝 웃더니 병실 밖으로 나간다.
자유롭게 걸어 나가는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가 귀에 들린다. 나도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멀쩡하게 걸어 다니지 않았는가.
오늘 아침, 나는 빌라 지하 방 창문으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빌라 사람들은 출근을 서두느라 바빴다. 그들은 주차된 차들을 차례대로 빼려고, 주춤거리기도 하고 재촉하기도 했다. 주차장이 빌라 사이에 간신히 마련된 이유이다. 나는 빌라 사람들을 배웅이라도 하듯 쓰레기를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반지하에서 나오면 눈이 하늘로 먼저 향한다. 어제 불타던 태양은, 밤새 물체의 틈을 찾아다니며 열기를 조각냈는지 다시 진정된 모습으로 떠올랐다. 말갛게 씻은 모습으로 나를 봤다.
출근할 시간이다. 현관에 들어서자, 어젯밤 아버지가 마신 술병이 내 시선을 잡아당겼다. 도대체 몇 개인가. 바로 전까지 내 머릿속은 조직장들 미팅 준비로 도서관 책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가지런한 책 사이로, 아버지의 목으로 넘어가던 술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흐르는 술을 말리듯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나는 머리를 말리던 드라이 바람을 세게 올렸다. 알코올은 다 증발해라. 세상의 술을 다 말려서 아버지가 말갛게 씻은 태양처럼 살게 하리라. 간다고! 드라이 소리에 동생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학교 다녀온다고 아까부터 계속 말한 모양이다. 반응 없는 나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내 출근 시간은 오전 아홉 시다. 집에서 도보로 오 분 거리에 사무실이 있다. 중학생인 동생을 위해 이곳으로 이사 왔다. 작년에 집 계약이 끝나면서 한 사람이라도 편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다. 지금 사는 집에서 전에 있던 사무실까지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아버지 챙기고 동생까지 챙기면 출근 시간 맞추기가 빠듯했다.
결국 이사 후에는 이직까지 고려했다. 인정받는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아까웠지만 잦은 지각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이직을 고민할 때마다, 컵에 가라앉은 설탕을 젓듯 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녹은 설탕물을 마시고 기분을 달래듯 다시 웃곤 했다.
그 행동으로 국장이 알아차린 걸까. 내가 이곳으로 이사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지수 씨 사는 지역으로 발령이 났어. 어머, 사무실이 지수 씨 집 근처에 있지 뭐야, 하는 국장의 말에 망막이 흐릿했다. 국장은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이다. 나를 여동생 같다며 보살피는 국장을, 나는 언니처럼 따랐다.
결과적으로 나에게 유리한 이사가 되었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집에서 군포에 있는 물품 집하장까지 한 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그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아버지는 나에게 고생했다는 말은커녕 이런 집으로 이사 왔다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버지는 그동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잖아. 그래도 된다는 각오로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
내 나이 스물세 살. 철새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아버지를 걱정했고, 착한 큰딸이라서 동생도 보살펴야 했다. 엄마가 안 계시는 자리까지 나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어젯밤 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봇물 터지듯 말을 했다. 항상 술기운을 빌어서 말을 하지만 어제는 작정한 듯 내게 쏘아붙였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이 일 못 하겠다. 쬐끄마한 택배 하나 들고 오 층까지 걸어 올라갔더니, 동이 틀렸다고 핀잔이나 듣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이래라저래라. 먹고 살기 힘들다. 지수야, 니 착하니까 동생 하나 먹여 살릴 수 있지? 아빠 이번에는 니한테 말하고 나갈란다. 이제부터는 니가 전부 해라.”
아버지 맞나요? 제가 먼저 이 집을 나갈 거예요. 도대체 제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요. 이제는 진짜 아버지를 포기하겠다는 다짐으로 마음에 켜켜이 쌓아둔 하얀 깃발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 혼자 다짐할 뿐. 아버지는 술병 옆에서 새우처럼 금세 잠이 들었다. 거실 전등이 아버지 입만 비추고 있는 듯했다.
평소보다 삼십 분 일찍 집을 나왔다. A동 앞을 지날 때, 옹기종기 피어있는 채송화가 작년보다 다정해 보였다. 시멘트 담벼락을 넘어 하늘을 향한 목련 나무가, 올해 역할을 다했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침 일찍부터 나를 바라보는 뭔가가 많았다. 갑자기 마음이 뜨거웠다. 말갛게 떠오른 태양도,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자리를 잡는 시간에 다시 불타겠지. 작년에는 느끼지 못한 여유다. 오늘도 무더위가 주차장 바닥을 얼마나 달구려나. 이 집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것처럼 신산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은 지 이십 년은 훌쩍 넘은 건물. 빌라는 A동과 B동으로 구분되어 있다. 둘 다 남쪽을 향해 있다. A동은 바로 앞이 도로라서 막힌 곳이 없다. 그에 비해 B동은 A동의 뒷면을 보고 있다. 바로 그사이에 주차장이 있다. 사람도 다니고 차도 쉬는 곳. 주차장을 지나 B동 입구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우리 집이다. 지하지만 환기도 잘되고, 남향이라서 햇볕도 들어왔다. 집 구조가 편리하게 설계되어서 지상에 있는 집 부럽지 않다. 아버지와 동생과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사는 이 집은, 나에게는 안정된 공간이다. 작년 봄에 이사 와서 벌써 일 년을 살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음이 바빴다. 회의 자료는 국장이 맡기로 했지만, 제반 준비점검은 내 몫이다. 더욱이 말갛게 씻은 태양이 초를 다투며 사무실을 달구고 있었기 때문에, 에어컨을 트는 것이 급선무였다. 우웅. 천장형 에어컨의 사면에서 바람이 나오자, 금방 시원해졌다. 너무 부지런 떨었나. 국장에게 뭔가를 보답하고 싶은 내 마음이 여름 태양처럼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뜨거워진 마음에 동생 지혜가 들어왔다.
동생은 나와 일곱 살 차이가 난다. 한창 꾸미고 멋 부릴 나이인데, 신발이 닳아도 내가 볼까 봐 먼저 가렸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언니 고생하잖아, 하며 나를 오히려 다독거렸다. 동생은 요즘 방학을 앞두고 오전 수업만 했다. 한낮에 더운 반지하 집으로 들어갈 동생을 생각하니, 시원한 이곳에 있는 내가 죄인처럼 느껴졌다.
“언니, 이따 학교에서 집에 오면 전화할게.”
“응, 어제 사다 놓은 돈가스 있으니까 네가 기름 냄비만 올려줘.”
동생은 중요한 약속을 확인받겠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맛있겠다. 게임 허락한 시간도 잊지 마.”
“약속했던 시간만 해야 한다!”
내년이면 고등학생이 되는데 아직도 나한테 일일이 보고했다. 남들은 착한 언니에 착한 동생이라고 하지만,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갈망하는 것처럼 애타게 탈출구를 찾았다. 혹시나 시커먼 속이 들통나면 어떻게 하나.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