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정치학보다는 인류학이 더 유효한 도구가 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해석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계몽주의적인 합리적 인간은 더 생각해서는 안 되고, 결국 폭력의 근원을 고찰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유형의 합리성을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 p.87
그러나 모든 의미에서 아주 사소한 차이로도 극단으로 치닫기가 촉발될 수 있습니다. ‘공격하는 사람은 항상 이미 공격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경쟁 관계를 한 번도 대칭적인 것으로 느끼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먼저 공격하고도 상대방이 먼저 공격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 p.123
헤겔은 전쟁을 영웅적이고 이성적으로 사적 이익을 극복하는 자기희생으로 보는 데 반해, 클라우제비츠는 더 강력한 거래라고 보는 아주 냉정한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 p.148
클라우제비츠는 그러므로 군인의 영웅주의를 자기 극복이 아니라 모방이 고조된 것으로 봅니다.
--- p.149
클라우제비츠 덕분에 헤겔의 신정론에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특히, 정신이 인간의 열정에 작용해 자신의 목적에 봉사하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한 의혹 말입니다.
--- p.150
역사가 폭력적으로 되풀이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성은 폭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길을 열어줍니다.
--- p.157
평화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정확히 말해서, 싸우는 사람들 사이에만 존재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그들의 ‘동일성’ 자체에서 자양분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폭력을 최종 ‘논리’로 여기는 전쟁의 황혼기인 엄청난 적대감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 pp.171~172
집단이 군중이 될 때 군중은 모방으로 다시 하나가 됩니다. 대체 작용이 개입하면서 군중의 폭력은 점차 소수 집단을 향하다가 가장 소수인 인물에게 집중됩니다. 마침내 혼란의 원인을 찾아냈다고 믿는 군중은 이때부터 모두의 적이 된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린치를 가하게 됩니다.
--- p.194
오늘날 자주 발발하는 테러의 의미가 무엇인지 클라우제비츠를 통해서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것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의미에서 총력전의 확대입니다.
--- p.201
왜냐하면 이것이 전쟁의 두 시대를 가르기 때문인데, 반대의 시대와 적대의 시대가 그것입니다. 극단으로 치닫는 결투는 모든 전쟁 규범을 무너뜨리면서 오늘날과 같은 예측 불가능한 세계적 폭력의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 p.220
끝에 다가갈수록 기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역사가 최악으로 다가갈수록 고대종교와의 대화는 더 절실해지는 것 같습니다.
--- p.221
타인과 우리를 연결하는 것은 모방인데, 우리의 유사성은 점점 커져서 결국 우리 모두가 유사성에 빠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레비나스의 표현대로 우리는 모두 ‘똑같은 것’ 안에 있습니다. 전쟁이 바로 존재의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 p.256
원시사회에서 폭력은 신과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신이 더는 나타나지 않는데, 이제는 더 이상 희생양이라는 배출구 없는 폭력이 한번 분출되면 상승작용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 p.261
폭력 발생의 중심에 모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그러므로 긍정적 모방의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p.273
우리는 오늘날 묵시록 구절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인간에 의한 자연 오염이라는 초현대적 문제와 함께 뜻밖의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 p.281
저는 당신의 말을 뒤집어서,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형태로 오늘날 종교가 되돌아온 것은 바로 우리가 종교를 멀리 떼어놓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언급하는 합리주의는 진정한 거리두기가 아니고, 우리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제방일 뿐입니다. 합리주의는 먼 훗날에서 보면 우리의 마지막 신화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한때 신을 믿었던 것처럼 이성을 믿었습니다.(…) 새로운 합리성은 묵시록적인 이성, 즉 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성입니다.
--- p.291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자신이 모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항상 타인들 앞에서 자신을 지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은 스스로가 타인으로부터 모방받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니체가 두려워한 신의 죽음은 바로 그리스도의 물러섬인데 그 덕분에 우리는 신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p.296
합법적이고 건강한 정치 행위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정치는 부정적인 차이소멸이 증가하는 것을 억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시간으로 들어서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야 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최악인 동시에 최고의 세상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많은 희생자를 죽였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희생자를 구했다고도 말하는 세상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모든 것을 증가시킵니다.
--- p.310
클라우제비츠는 어쩌면 최초의 현대 작가 가운데 한 명, 특히 위대한 르상티망, 즉 원한의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게 적의 관점에서 쓰였기에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설명은 다른 사람들의 설명보다 더 공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한의 관점은 종종 이른바 ‘역사적 객관성’보다 더 사실적인 분석을 제공해줍니다.
--- pp.348~349
극도로 불안정한 우주의 중심에는 폭력이 화해로 변하는 ‘친밀한 중개’가 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환기해야 하는 것은 모방적 욕망의 메타포가 아니라 역사적 운동으로서 낭만주의입니다. 선생님에게 그런 것은 프랑스와 독일 관계의 양면성과 같은 것 같습니다.
--- p.352
먼저 정치적 사례부터 살펴봅시다. 1958년 콜롱베에 있던 드골의 사저에서 진행된 드골과 아데나워 회담에서 특히 아름다운 것은, 유럽이 죄를 범한 그곳에서 어떤 식으로든 용서받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례 없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서로를 너무 모방한 두 나라의 폐허 위에서 과도한 모방이 최악의 사태를 불러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정말 예외적인 순간입니다.
--- p.376
교황은 이성이 너무 지나치게 믿음과 투쟁하면 믿음은 이성에 반대하는 더 불안한 신앙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위험을 주장하면서 편협한 합리주의의 위험을 경고할 수 있을 뿐입니다.
--- p.420
그렇지만 저는 이성과 신앙의 대화가 합리적 대화가 되기를 바라는 교황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가 기도하는 신학적 이성은 합리주의와 신앙 절대주의의 신비를 벗겨내야 합니다.
--- p.433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세계를 파괴할 수 있게 된 오늘날 인간이야말로 자기몰락의 당사자들이다. 기독교 차원의 전형적인 도덕적 비난뿐 아니라 인류학적으로도 피할 수 없게 확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잠자는 우리 의식을 깨워야 한다. 안심시키려는 마음은 언제나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 p.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