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보인다. 네 머리 위에 뜬 초록색 링이. 보인다. 너에게 다가올 죽음의 디데이가.
--- 「프롤로그_너의 디데이」 중에서
“류담 걔, 자발적 아싸잖아.”
“지 혼자 우리 반을 왕따 시킨다니까? 웃겨 진짜.”
“뭐 되는 줄 아나 보지.”
“싸가지 없게 말하면 멋있는 줄 아나. 으, 오글거려!”
중학교 시절, 복도나 화장실을 오가며 우연히 들은 내 평판은 좋지 못했다. 뭐, 그럴 만도 했다. 학교에서 나는 늘 혼자였으니까. 잘 웃지도 않는데다 누가 말을 걸어도 시큰둥했다. 간혹 ‘친구’라는 이름으로 선을 훌쩍 넘어오려는 애들한테는 무례할 정도로 차갑게 반응했다. 그런 나를 더러는 사회성 박살난 애라 칭했고, 더러는 중2병이라 단정지었다.
--- 「자발적 아싸」 중에서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친구의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죽음을 막지 못했다. 그 사실이 나를 맥없이 무너뜨렸다. 죽음의 디데이를 보는 능력은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의 그것처럼 세상을 구하는 특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얼마나 미약하고 쓸모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형벌에 가까웠다. 머릿속의 생각은 차곡차곡 쌓여 확신과 신념으로 점차 굳어져 갔다. 누구든 정해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나 또한 죽음의 디데이가 언제인지 볼 수 있을 뿐, 그 죽음에 조금도 관여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설프게 돕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도록 애초에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된다. 나랑 관계없는 사람의 디데이는 내 눈에 보이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척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 더는 사람과 관계 맺지 않기. 더는 사람을 믿지 않기. 그것이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죽음의 디데이」 중에서
“너, 혹시 숫자가 보이는 거냐?”
“네?”
화들짝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섰다.
“맞구나.”
아저씨가 내 반응을 보고 확신하는 눈빛으로 입술을 실룩거렸다. 무성한 수염이 입술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흠…….”
털보 아저씨는 진지한 얼굴로 눈썹을 까딱이더니, 손에 든 물병을 따서 일회용 접시에 졸졸 따랐다. 그리곤 쭈그려 앉아서 하트 고양이 앞에 놓았다.
“아저씨도 디데이가 보여요? 그런 거죠?”
--- 「또 다른 능력자의 등장」 중에서
“좋아해.”
소미소가 대뜸 말했다.
“알아, 말했잖아.”
“하, 아니…… 빵 말고 너 좋아한다구.”
“…… 뭐?”
갑작스러운 말에 놀란 내가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자, 소미소가 처음으로 시선을 피해 고개를 스르르 숙였다. 그리고 긴장한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윽고 입을 뗐다.
“담아, 우리…… 좀 더 가까운 사이로 지내는 거 어때?”
--- 「새로운 변수」 중에서
아저씨가 사자 갈기 같은 풍성한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은 보통 자기 목숨을 거뜬히 내놓을 정도로 이타적인 존재는 아니잖냐. 굳이 따지자면 이기적인 존재에 가깝지. 그런 인간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건, 인간의 본성이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 음, 그런 돌연변이 같은 행동이 우주 질서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서 기적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내 말은, 목숨을 건 희생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설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거다.”
지금껏 내가 몰랐던 규칙을 천천히 읊조리는 아저씨의 말에 담긴 뜻은 분명했다. 관두란 뜻이겠지. 소미소를 구하는 일에 나의 목숨까지 걸 게 아니라면.
--- 「능력을 누릴 행운, 혹은 자격」 중에서
수다스러운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나는 말없이 커피 빨대를 물었다. 그리고 생각 없이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탓, 하고 이소현의 머리 위에 뜬 디데이가 갑자기 바뀌었다. 한참 길었던 숫자가 ‘5’로 확 줄어들었다.
이건 또 뭐야…….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곧바로 털보 아저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의 손은 커피를 내리고 있었지만, 눈은 정확히 이소현의 머리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저씨도 나처럼 이소현의 디데이가 바뀌는 걸 목격한 게 틀림없었다.
--- 「꿈꿔본 적 없던 미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