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걸어오는 시간
꽃이 처음 꽃잎을 열 때 무슨 말을 할까요?
나비가 햇살 아래로 날아 나오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방울새가 나뭇가지에 날아와 앉으면서 무슨 마음을 노래할까요?
이런 생각들을 하고 그 대답을 글로 써보는 것이 시의 출발입니다. 시에 쓰이는 말이 반드시 멋지고 유식한 말들이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반드시 아름답고 화려한 문장의 옷을 입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이같이 너무도 단순하고 어린아이다운 생각으로 시인은 시를 출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단순하고 어린아이다운 말이 윌리엄 워즈워드의 그 유명한 「무지개」의 첫 구절입니다.
--- pp.13-14
저는 저의 시 「눈 오는 밤에는 연필로 시를 쓴다」라는 시의 후반부에서 ‘조르주 상드니 버지니어 울프 샬롯 브론테니 앨프렛 테니슨’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눈오는 밤에는 옛날의 책들
조르주 상드니 버지니아 울프
샬럿 브론테니 앨프리드 테니슨,
읽으면 금방 한숨이고 눈물인
김소월이니 백석이니
그런 이름을 A4용지 다섯 장에
덧없이 끄적거리고 싶다
이 시인들은 모두 낭만주의 시대에 뛰어난 작품들을 남긴 작가, 시인들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조르주 상드는(1804~1876)는 이 세상에 와서 일흔두 살을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고 많은 예술가들과 사랑을 했던 작가입니다.
--- p.104
저는 몇 년 전에 「시인이 되어 암소를 타고」라는 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쓴 시를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시인이 되어 암소를 타고 가면 보인다
태어나 그 동네밖엔 아무 데도 못가 본 나비가
세상 바깥은 알려고도 않는 도랑물의 송사리가
제 날개 닿는 하늘만 세상 전부인 줄 아는 잠자리 떼가
암소를 타고 짚신을 신고 가면 보인다
아직도 옛날 옷 그대로 입고 봄 마중나온 꽃다지가
엉덩이에 똥을 묻히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암소가
이제는 서 있기도 힘겨워 그만 누워도 괜찮을 뒷동산 소나무의 생애가 …
이쯤이면 여러분은 제가 산골 출신, 조금은 가난하고 순박했던 아이, 남다른 감수성과 궁금증이 많았던 소년이었음을 짐작할 것입니다. 그런 만큼 저는 소년 시절, 풀꽃과 나무, 새와 곤충을 좋아했고 나뭇잎 지는 소리, 도랑물 흐르는 소리, 빗방울이 처마에 떨어지는 소리, 갈대 잎 서걱이는 소리를 좋아했습니다. 나생이와 꽃다지, 씀바귀와 냉이, 비비새와 종달새, 때까치와 곤줄박이를 좋아했습니다.
--- pp.123-124
저는 매일 시를 읽습니다. 아마도 시를 읽지 않고 지나가는 날은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
고려 시대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도 그의 산문집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시를 좋아해서 매일 시를 읽는다. 병이 나서 몸이 아프면 안 아픈 날보다 시를 더 많이 읽는다’(詩酷好病中倍於平日)
그러니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시병(詩病)에 걸립니다. 시를 너무 좋아하는 것도 일종의 시병이니 이 병에 걸리면나을 방도가 없습니다. 아니 아예 나으려하지도 않습니다.
1930년대 시인 이상(李箱)은 친구 김기림(金起林)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런 병을 ‘고황(膏?)에 든 병’이라 했지요. 어떤 약을 써도 낫지 않는 병이 ‘고황에 든 병’입니다. 저도 고황에 든 병을 갖고 있나 봅니다.
저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감각을 시로 맛보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잘 키운 채소를 한 입 베어 무는 것 같은 느낌에 비길 수 있습니다. 황인찬이나 박준의 시가 그런 시들입니다.
쌀을 씻다가
창밖을 봤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전문
--- pp.185-187
어려운 말로는 정동(情動,affectus)이라는 용어가 해당되겠는데 스피노자가 했고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다시 한 이 말을 여기서 굳이 끌고 올 필요도 없이 이 시를 쓰는 시인의 정서의 움직임, 감정의 이동상태를 가감 없이, 아무런 삭제 없이, 의식의 흐름에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 놓은 것이라 보면 됩니다.
‘나에게는 어떤 충동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다’라고 쓴 시인의 말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내용 없는 아름다움’ 대신 ‘내용 없는’ 시 읽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그런 시는 그 나름대로 유효한 것입니다.
예쁜 시는 예쁘고 깜찍한 시는 깜찍하고 정겨운 시는 정겹고 아름다운 시는 아름답습니다. 그만하면 시가 제 몫을 다 한 것입니다.
--- pp.201-202
인류의 역사는 전쟁이 그려놓은 거대한 벽화입니다. 거기엔 사랑이 있고 이별이 있고 싸움이 있고 패배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고 눈물이 있는가 하면 승리가 있고 환희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영국의 철학자 허브트 스펜서는 ‘전쟁은 인류의 진보와 발전에 공헌한다’는 역설을 내놓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 많은 전쟁 가운데 오직 하나, 6?25 전쟁을 겪었습니다. 6?25 전쟁은 내 소년의 기억 속에 많은 것을 심어 준 추억의 흑백사진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북한 인민군이 보병 20만과 전차포대를 이끌고 남한을 침공한 6?25. 내 기억의 흑백사진 속에 투영되어 있는 그들의 실루엣은 먹구름 같고 파도 같고 소낙비 같고 홍수 같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은 남한에서만도 50만을 넘는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이 한국전쟁이라 합니다. 전쟁이 일어난 그 해 나는 여덟 살, 초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 pp.237-238
세월이 흐를수록 대중문화의 힘은 강해지고 순수문화의 힘은 약화되는 시대에 나는 시인들이 모두 멀리하고 기피하는 소재인 ‘돈’에 대해서 한 편의 시를 썼습니다. 아마도 제가 돈에 대해서 시를 쓰게 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돈은 살아서 거지처럼 떠돌며
세상의 목마른 자를 희롱한다
장님도 귀머거리도 그에게 손 벌리며 허리 굽힌다
고집 센 돈은 아무리 전언해도 대답하지 않고
제 몸을 팔며 사며 하얀 가난같이 꽃핀다
저자에서는 쑥 미나리 돌미역 파래들도
몇 다발의 돈이 되어 팔려나간다
인플루엔자처럼 독감처럼 옮아 다니는 창녀여
돈이여
누구든 일생을 걸어 너의 문간에 닿아
비로소 편안과 일락을 얻는다고 굳게 믿지만
저 순금 햇빛이 그의 입김으로 더워진 적 없다
물소리가 그의 부름으로 노래한 적 없다
돌고 돌아서 돈이라 이름 했다는 익살 속에서
너와 내가 자리하고 누울 곳은 돈 아닌 온돌
수챗물과 거지의 손에서도 반짝이는 돈이여
너 없이도 튼튼한 저 상수리나무를 보라
너에게 구걸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청호반새를 보라
「돈」 전문(미발표)
『시로 여는 세상』 (2006년 겨울호)
--- pp.262-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