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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2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120쪽 | 178g | 128*205*8mm
ISBN13 9788932042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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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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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 몇과 만나 술을 마셨다. 우리는
제각각의 이유로
제각기 억울하고,
억울한들 취하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고, 몸속에
서로 다른 짐승들이 살고,
나무가 죽어 계절이 오가고, 눈떠보니
사람이었듯 시인인 거라서,
서로의 굽은 몸에서 이를 잡아주는 원숭이처럼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워준다.
우리가 가던 단골집들은 다 망했다고, 그런데
우리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고, 망할 것 자체가 없다고,
이 가게도 망할 리가 없지, 이미 망했으니까,
서로의 말꼬리를 물고 농을 던지다 보니 실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사이라는 것을 기억해내곤 말없이
하나둘 사라졌다.
--- 「코케인」 중에서

그는 지옥이었고 사랑이었고 희생이었으나
그는 무능력이었고 아집이었고 알코올이었으나
나는 그와 비슷한
피부 색깔과 좁은 어깨와 걸음걸이를
가진 탓에
그는 두려움이고 사방 창 없는 벽이고 천장이고
가계의 첫머리였기에
그의 신화가 죽은 화분 위에 버리는 물처럼
마음속으로 흘러든다.
--- 「피붙이」 중에서

이념도 없고 분노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워 봄이다.
까마득한 크레인 위에서 겨우내 사람들이 얼어갔고, 젊은 청년들이 자꾸 죽었지만, 친하지도 않은 이들과 어깨 겯지르고 같이 취해 나뒹굴며 황망하게 흘러 다니다 보니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고 사무실에 앉아 버려져가는 반쪽짜리 노동이 되었다.
나는 버려지기가 무서운 것일까. 그래서 착한 척이나 하는 것일까, 하다가

그저 밤늦도록 취하기 좋으니 봄이다. 가끔 술에 취해 전화하는, 지금은 꽤 잘산다는 친구를 생각한다. 그 친구의 꿈은 아직 시인일까 내가 생각한 것은 이따위 것이 아니었다. 나나 그 친구나 포즈만을 꿈꾸었구나.
--- 「입춘」 중에서

그 누구도 자신의 불행을 견디기로 다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견뎌지는 것이거나(신은 견딜 수 있는 불행만을 허락한다는 의미에서는), 좌절시키는 것이거나, 견디고 있나 싶으면 어느 사이 얼굴 속으로 흘러들어 굵고 깊게 스미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물성을 지닌 것으로 느껴진다. 무겁거나, 거대한 검은빛이거나, 차갑거나, 견딜 수 없이 뜨겁거나, 거칠게 떨리거나. 하지만 그 물성은 만져지지 않는다. 만져지지 않으나, 그것은 서로 다른 몸과 몸이 뒤섞이듯 어떤 기형의 자세를 체득하도록 한다.
--- 「유전」 중에서

그날 이후 나는 몸 위로 숱한 선을 그었습니다. 그때마다 몸이 마음을 붙잡으려고 해서, 폭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전부 그 선입니다. 이 선을 다 헤아려보세요. 헤아리는 마음. 죽어서도 마음이 넘치면 귀신이 됩니다. 그것과 같은 부족이 됩니다. 당신은 읽었습니까. 헤아렸습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살아 있습니까. 내일의 비는 파토스처럼 쏟아질 겁니다.
--- 「선으로부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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