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티브 고시는 『대혼란의 시대』(에코리브르, 2021)에서 상상력의 문제를 제기한바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정서이며, 예술이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정동의 역학이다. 과학적 사실들이나 불길한 예측들로 경각심과 윤리적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학 창작의 근본이 ‘무엇’에 관해서라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있듯이, 대중의 역량과 실천, 생태주의적 미래에 관한 정치적 열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다른 방식의 미학적 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김운하, 빌어먹을 사악한 문제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중에서
기록되고 보존된 시간을 유동적으로 풀어헤쳐 뒤적이는 이런 실천에는 여전히 선형적인 시간관과 그에 따른 대조 행위가 숨어들어 있다. 답답한 체계 안쪽에서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키우고자 과거 속에 잊히거나 묻힌 가능성을 발굴해 영영 잃어버릴 뻔한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서 말이다. (……) 현재의 땔감으로 사용하고자 곱게 미분한 과거에서 아무 시기나 무작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모사하고 모의한 뒤 그 출력물을 곧바로 레트로로 입력해 돌려대면서 시간은 기어이 구분 불가능할 정도의 곤죽이 되어버렸고, 그 반죽을 두꺼운 막으로 제 안팎에 처바르는 2020년대의 웹 속에서 우리가 겪는 시간 감각은 점차 무뎌진다.
---「나원영, 미래는 상대적 개념 2?주인 없는 미래」중에서
사건의 주범들은 체포되어 전 국민의 엄청난 비난 속에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받았고 주범들의 가족에게 테러가 벌어졌다. 분노는 사그라들었고, 시민들은 안전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했다.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는 생존의 문제임을 깨달은 것이다. 시민들은 안전하고 건강한 삶, 자유롭고도 고립되지 않는 개인들의 사회, 사람, 자연, 기술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시장경제, 지역사회 공존과 발전을 위한 분권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권에 표를 던졌다. 마침내 2050년 대한민국은 블랙아웃의 날을 교훈 삼아 성숙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노영권, 2050년 대한민국 4일」중에서
3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궁금할 것이다. 앞으로 책은 어떻게 될까? 소크라테스는 책을 반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자와 글쓰기는 사람들에게 글로 쓰인 것만이 앎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착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책은 정보에 불과하고, 진정한 앎은 우리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책도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형식일 뿐일까? 파피루스, 볼루멘, 코덱스. 기원전 4000년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유효기간이 조금 길었던 어떤 지식 플랫폼의 황혼을 보고 있는 것일까?
---「문지혁, 멸종과 생존」중에서
몇 해 전 로봇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폭력을 금지하고 과태료를 부과하는 로봇기본법이 제정되었음에도, 평등추진연대가 이에 따른 신고를 하지 않고 차별 구제 소송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평등추진연대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반복되는 로봇에 대한 이번과 같은 차별 사건을 막기 위해서는 평등 개념에 적용되는 대상을 인간을 넘어 확장시키는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한편으로 로봇기본법은 물리적인 폭력만을 금지하고 있을 뿐, 이 사건과 같이 비하적 발언을 통한 부당한 대우는 금지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박한희, 차별받는 로봇, 평등을 위한 질문」중에서
희곡을 읽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희곡 읽기를 위한 방법은 있다. (……) 그것은 먼저, 머릿속에 ‘상상적인 극장’을 세우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 로날드 헤이먼은 이 작업을 ‘상상적인 극장mental theatre’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다. 연극을 보러 극장에 갈 수 없는 독자가 희곡을 읽는 방식이 상상적 읽기라는 것이다. 이 방식이 극장에 가는 것보다 불리할 수는 있지만, 독자의 상상은 어떤 훌륭한 극장이나 어떤 뛰어난 배우보다 이상적으로 무대를 그릴 수 있다.
---「양근애, ‘구멍 뚫린 텍스트’의 비밀」중에서
때로 아름다움이란 좋은 것의 집합이다. 누구나 가지긴 어려울 정도로 비싸고 세련된 우아한 무언가다. 배제하고 엄선해낸 결과다. 그 사실을 수긍하기까지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 어쩌면 아름다움은 더 나은 곳으로 가기 위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 아름다움이란 그리움이다. 별 볼 일 없는 물건이 풍기는 소중한 사람과의 기억이다. 할머니가 죽은 뒤, 내가 할머니의 탁상스탠드를 아르떼미데 스탠드보다도 갖고 싶어 하듯이. 그런 개인적인 소중함이 스탠드의 허름함을 없애지는 않는다. 의미는 허름함, 열악함을 해결해주지 않고 각자가 가진 의미는 충돌하고야 만다. 다만 그 의미들은 세상에 머무를 때만 생겨나는 것을, 의미에 앞서는 살아 있음의 선명함을 알려준다.
---「임지은, 아름다움에는 더 많은 것이 속해 있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