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가 망가뜨린 우리 민족의 심성을 더욱 악화하도록 만든 일제가 한반도에서 사라지자 남북 조선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오랫동안 쌓인 국가에 대한 불신이 쉽게 돌아올 수는 없었지만 국가가 없을 때 겪었던 치욕과 수모, 불이익과 차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라 강대국이 한반도에 새로운 국가를 세워 주었기에 가능했다.
--- p.28, 「서론」중에서
냉전 시대 김일성만큼 강력한 공공의 적은 없었고, 반공주의 체제에서 국민적인 적이 되었다. 농지개혁으로 실마리가 마련된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은 한국전쟁과 반공으로 확립되었다. 해방 이후 계속된 공산주의와의 갈등은 민주주의의 승리로 귀착되었다. (중략) 남북은 6·25를 겪음으로써 쉽게 화해할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고, 각자 서로 다른 이념 아래 대치하면서 서로 흡수통일을 할 기회만을 노리는 소위 치킨 게임을 벌이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 피해에도 불구하고 6·25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긍정적인 몇 가지 결과를 낳았다.
100~101, 「1. 공산주의와의 갈등」중에서
특히 노태우 대통령은 군부독재에서 문민정부로의 이양을 순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한 정부 내에서 시행한 정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업적을 쌓아 지금까지 우리가 누리는 자유, 민주의 번영의 기틀을 세웠다.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에 따른 적극적인 북방정책은 조금만 실기했어도 우리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줄 수 있었다. 특히 북방정책의 핵심인 소련과 중국과의 수교는 그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대사급 수교가 가능했다. 지도자의 순간적 결단이 우리의 국격을 한 단계, 아니 여러 단계 끌어올릴 수 있었다.
--- p.108~109, 「1. 공산주의와의 갈등」중에서
이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케 했다. 4월 18일 고려대생 시위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교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의 발포로 학생 시위는 폭동화했다. 전국적으로 부산,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등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4·19 당일 서울에서만 130여 명이 죽고 1,000여 명이 다쳤다. 경찰의 발포와 동시에 계엄령이 반포되고 육군참모총장 송여찬이 서울지구 계엄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19 이후 일반 시민도 가담한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4월 21일 내각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어 이기붕 당선자가 사퇴하고 4월 23일 장면 부통령도 그 직을 사퇴했다. 이 대통령은 자유당과의 결별을 선언했으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일부는 반공청년단과 자유당 간부의 집을 방화하고 다녔다. 4월 25일에는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며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다.
--- p.135, 「2. 개발독재를 둘러싼 갈등」중에서
호남에 대한 포용과 연대 분위기 조성, 김대중 비토 세력의 제거,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 중단 등은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호남이 대한민국으로부터 소외되어 이탈하지 않고 다시 한번 전 국민이 한마음으로 ‘대한민국’을 연호할 수 있게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을 사형에 처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에 동의하고 대통령 취임식과 청와대 만찬에 두 대통령을 초청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회의나 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그리고 비서실장에 영남 TK 출신 김중권을 임명하는 등 그 지역에 관한 관심과 배려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중략) 이러한 지역화합과 부패 척결 노력이 국가로부터 수탈받은 과거 악몽 때문에 이기심과 각자도생에 익숙한 국민이 국가를 믿고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끌어냈다. 곧 지역화합은 상생의 길이었고 이러한 아픈 과거의 치유였다.
--- p.232~233, 「3. 정치권력의 교체」중에서
취업이 제한된 일부 운동권 출신들은 대치동 등 학원가에 취업해 당시 대학 입학시험의 주요 과목인 논술시험의 강사로서 고등학생이나 재수생을 상대로 비판적 시각을 키워준다는 핑계로 자연스럽게 반정부, 반체제 의식을 심어주었다. 당시 우리 사회의 주요 담론이었던 반공은 잘못된 것이고, 평생 항일투쟁을 해 온 이승만 전 대통령과 우리나라를 부국으로 만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파라고 가르쳤다. 일본의 식민 지배나 소련과 미군정의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얼마나 어렵게 수립했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6·25 남침과 끊임없는 도발을 이겨내고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과 이를 수호할 의식 기반이 아직 충분히 갖춰지지 않는 학생들에게 북한의 입장을 주입하는 교육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화근을 심어놓은 결과가 되었다.
--- p.259, 「4. 포퓰리즘의 등장」중에서
(중국은) 한국의 K팝은 물론 기업인들이 중국에 들어오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을 통해 자유의 물결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특히 시장경제의 근본인 사적 소유권 제도를 보장하지 않는 현 중국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중국의 부자들이 싱가포르 등으로 대거 이주하고 있는 것도 중국 당국의 고민이다. 그래서 혐한 감정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애국주의를 동원해 이를 공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국이 중국과 같은 독재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않고 시장경제의 기반인 사유재산제를 포기하지 않는 한, 중국에 대해 아무리 저자세를 보이더라도 한국을 무시하고 멀리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과 가까이 지내는 베트남과는 친선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베트남이 같은 사회주의 국가임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p.291~292, 「5. 대중국 갈등과 북한」중에서
어쨌든 좋은 환경과 아빠, 엄마 찬스에 안주하는 세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노력보다는 부모의 힘으로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가게 되므로 자기 삶의 미래에 대한 절박감이 없어져 버린다. 그러한 이들이 굳이 결혼해 처와 자식을 부양할 의무감이나 동기를 가질 이유가 없고, 남편과 시집을 봉양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신도 부모처럼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이 되어 자기 자식들을 키우거나 가르치고 평생을 뒷바라지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 절망하는 순간 결혼을 하거나 자식을 낳아 기를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대부분 엘리트에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모방 사회인 현대사회에서 엘리트의 현실은 남보다 지기 싫어하는 그보다 못한 계층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저출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남과의 경쟁으로 살아온 2세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이 경쟁에서 이기게 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오히려 결정 장애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라가 잘살게 되고 그 국민도 세계에서 몇 번째 안 가는 부를 누리게 되었지만, 이를 이루어 낸 2세대는 자신의 성공 신화를 자식들이 재현하도록 숨을 쉴 틈 없이 몰아붙인 결과가 자식들을 자유인이 아닌 정신적인 노예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 p.323~324, 「6. 새로운 미래를 위해」중에서
모든 생물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도 부패하게 되어 있다. 다만 그 부패를 미리 방지하거나 부패가 발견되었을 때 즉시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 성장할 수 있다. 양극화가 없던 시대도 없었고 그러한 국가도 없었다. 결국 이것도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국민의 생각과 태도 및 역량에 달려 있다. 보다 많이 배운 사람, 더욱 많이 가진 사람, 더욱 많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보다 못한 사람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바로 조선이 500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이를 실행한 양반 계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지 엘리트로 불리는 사람들의 책임과 의무가 강조되고 있다. 모든 힘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
--- p.345~346, 「6. 새로운 미래를 위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