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수십억 광년만큼 멀었던 스쿠버다이빙에 도전해서 끝내 리브어보드 다이빙(배 안에서 숙식하며 일정 기간 바다에 머물러 다이빙하는 것)을 했고, 수영을 배워 수영장 전설이 되었으며, 해녀학교에 발을 들였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는 해녀들의 삶을 듣고 감동하여, 앞으로 육지해녀 알리미가 되기로 다짐했다.
수영복을 갈아입은 후 쭈뼛쭈뼛 깊이 5미터 풀 앞에 도착해 다이빙 슈트를 입었다. 쫀쫀하고 두꺼운 고무 옷에는 손목 발목 하나 매끈하게 들어가지지 않았다. 몸과 슈트에 물을 묻혀 가며 억지로 몸을 구겨 넣었지만, 팔을 옆구리에 붙일 수도 없었고 걷기조차 힘들었다. 온몸에 석고를 부어 말린 것 같았고, 팔다리 움직임이 로봇 같았다.
인상 험악한 강사님이 아무리 입수하라고 불호령을 내려도, 이젠 어차피 물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으니 얼른 발을 떼자고 나 자신을 구슬려도, 무슨 일이 생기면 주위에서 도와줄 테니 죽을 일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발은 바닥에 붙박여 단 1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강사님인가 했는데 남편이었다. 남편은 자기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내 상태가 너무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당시 나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남편의 손에 이끌려 바닥으로 내려가는 짧은 몇 초 동안 수십 년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신기한 경험을 했다. 걱정하는 남편의 눈빛이 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도는 것 같았고, 그날 처음으로 이젠 조금씩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첫 수영장 교육을 마치고 나온 나의 몰골은 처참했다. 혹시 수경 안으로 물이 들어올까 봐 끈을 얼마나 조였던지 수경을 벗자 눈 주위가 벌겋게 피멍이 들어 판다 같았고, 부력 조절이 되지 않아 물에서 오르내리기를 수십 번 반복한 탓에 귀는 먹먹하고 머리는 어지러워 눈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강사님은 고백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노라고. 그리고 나도 고백했다. 나는 강사님의 말을 듣고 이 끈을 잡지 않으면 평생 ‘다이빙’이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짙은 실패의 기억을 떠올리며 개인적인 열패감에 빠지겠구나 싶어서 자존심이 상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드디어 넓디넓은 바다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렸고, 리브어보드에서 작은 보트로 옮겨 탄 다음 상어 포인트 가까이 이동했다. 스태프의 지시대로 랜턴을 켜고 “원 투 쓰리” 카운트와 함께 모두 동시에 보트에서 뒤로 몸을 굴려 입수한 뒤 천천히 하강해서 모래바닥에 내려 바위를 하나씩 붙잡고 앉았다. 까만 바다에 다이버들이 밝힌 랜턴 불빛 사이로 호흡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흥분과 긴장의 물방울이 조류를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는 이것이 다이빙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바다에 있을 때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당시 보고 느낀 광경과 감상은 아무리 함께하고 싶어도 완벽하게 공유할 수 없다. 그저 남들도 내가 본 걸 봤겠거니, 나만큼 놀랐으려니, 나처럼 황홀했으려니 추측할 뿐이다. 그래서 다이빙은 오롯이 혼자인 인생과 닮았고, 특히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때 몰디브 바다 깊숙한 곳에서 말 한마디 못 하고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가며 유영하는 상어를 눈으로 쫓던 나와 지금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분명 같은 사람인데, 그때와 지금의 괴리가 너무 심해서 가끔은 나를 그 바다에 두고 온 건 아닐까 의아해진다.
나이 들어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게 다행이었다. 아니 수영뿐 아니라 모든 분야의 만학에는 단점 못지않게 장점이 많다. 젊은 사람들보다 취하고 포기할 것을 현명하게 구별해낼 줄 알고, 주변의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뚝심도 있다. 머리와 몸은 말을 듣지 않아도 의지만은 충천해서 쉬이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 일찍 수영을 배웠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뭘 배우기 딱 좋은 나이 사십 중반에 수영을 시작한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른다.
수영은 내게 뭐든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간 하게 된다는 희망의 증거가 되어주었다. 이후로 수영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선수가 되어 기록을 내야 하는 상황이 아닌 한) 누구나 언젠가는 할 수 있다고, 내가 산증인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내 말을 그저 그런 ‘고생 후 성공담’ 정도로 치부하고 믿지 않는 눈치여서 아쉽다. 아마 그래서 이렇게 나의 부끄러운 면까지 다 까발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많은 사람이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일에 도전해서 의외의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비단 수영을 비롯한 운동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꾸준히 하다 보면 어떤 분야에서든 어느 순간 훌쩍 성장한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이 없던 어느 일요일, 나는 자유수영으로 25미터 풀을 쉬지 않고 서른 바퀴 정도 돌았다.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30분 이상 달렸을 때 만끽한다는 극도의 행복감, 러너스하이(runners’ high)가 내 온몸을 감쌌다. 그날 나는 나의 성취를 마음껏 기뻐했다. 얼마나 피눈물 나게 노력했는지 가장 잘 아는 내가 크게 기뻐하지 않으면 누가 축하해주고 격려해주겠는가.
섬은 자유요, 구속이다. 섬은 낭만이요, 공포이다. 섬은 고요요, 들끓음이다. 섬을 조금 아는 내가 섬을 처음 알아가는 친구들을 안내해 다녀온 3박 3일의 기억 덕분에 우리는 언제고 다시 만나 자유이자 구속을, 낭만이자 공포를, 고요이자 들끓음을 확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