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에 담긴 재료는 단순한 편이지만 그 맛을 좌우하는 요소까지 단순하지는 않다. 커피는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식품이다. 가열(로스팅)을 통해 일정한 향을 만들기 까다롭고, 커피의 향미를 구성하는 성분은 주도적인 성분이 없이 각각의 성분 조화로 나타나는 향미라 조성이 조금만 달라져도 느낌이 달라진다. 그날 온도와 습도뿐 아니라 추출하는 물의 미네랄 조성만 달라져도 향미가 확 달라지기도 하니, 재현성을 유지하기 정말 어렵다. 그래서 원리를 아는 것도 필요하다. 이론으로 방향을 잡아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되는데, 이론적 뒷받침이 없이 파고들다 보면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원리와 방향을 아는 전문가는 어떤 차이점이 발생할 때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초보자는 오히려 원인을 잘못 이해하고 차이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문제를 키워나가기 쉽다.
--- p.23
생두는 가장 단단한 과일의 속 씨에 속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세포 하나하나가 로스팅 중의 고압을 견디는 고압 반응로처럼 작동한다. 커피의 단단한 세포벽 덕분에 강력한 로스팅을 가능하게 하고, 로스팅된 향미도 오래 유지되는 것이다. 세포벽이 로스팅의 핵심 조건이라는 것은 생두를 분쇄하여 로스팅하면, 기존의 커피와 같은 향미를 발현시키기 힘들다는 것으로 알 수 있고, 단단한 세포벽이 향미 보존에 핵심이라는 것은 로스팅한 원두를 분쇄하면 금방 향미가 손실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 p.93~95
커피의 향미는 고온의 로스팅으로 만들어지는데, 향미 물질을 만드는 만큼 열에 의한 파괴도 동시에 일어난다. 따라서 생두가 버티는 범위 안에서 강한 열량을 투입하여 신속하게 로스팅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생두가 열에 얼마나 잘 견딜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만큼 실패 없는 로스팅이 가능한 것이다. 온도 변화의 그래프를 통해 생두가 얼마만큼 열에 견디는지를 추정할 능력이 생기면 감각적인 제어가 아닌 수치적인 제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 p.160~161
볶은 느낌을 내는 FFT는 피리딘 및 n-메틸피롤과 같이 로스팅이 시작된 지 200초대에서 발생한다. 이에 비해 블랙커런트 향이 나는 3-메르캅토-3-메틸부틸 포름산염은 이 단계에서 이미 분해가 진행 중이다. 버터 느낌의 향이 나는 디아세틸도 이미 형성되었다가 조금씩 분해가 진행된다. 엿당 느낌의 향이 나는 스트렉커 알데히드 물질(O11, O12, O15)은 260℃ 등온 로스팅 환경에서는 흙내 느낌의 피라진(O12, O14)과 같이 2~3분 정도에 형성된다. 연기 느낌의 4-비닐과이어콜(O16)은 70초대가 지나 형성되어 130초대에서 최대치를 이룬 뒤 조금씩 분해된다.
--- p.221~222
원두를 분쇄할 때는 크기도 중요하지만, 크기의 분포도 중요하다. 가능한 같은 크기, 균일한 것이 좋다. 입도가 균일해야 그 크기를 기준으로 이상적인 추출이 가능하다. 입도가 작은 것과 큰 것이 같이 있으면 큰 것을 기준으로 추출하면 작은 것에서 과도한 추출이 일어나고, 작은 것을 기준으로 추출하면 큰 것에서는 추출되지 않고 손실되는 부분이 많아진다. 완벽한 추출이란 한마디로 원하는 성분을 최대한 녹여내면서 원하지 않는 부분은 녹여내지 않는 기술이다.
--- p.260
물의 조성의 변화가 커피의 추출 시 관능 속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고자 총 경도와 알칼리도를 변화시켜 실험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부분 결과에서 유의한 차이가 나타났다. 수질의 변화가 커피 맛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떤 물이 커피에 더 적합하고, 경도와 알칼리도의 변화가 풍미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그 패턴을 알 수 있는 결론은 없었다. 물의 경도와 알칼리도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준이다. 맛이 변하는 구체적 기작은 아직 잘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원인으로 1) 총 경도가 추출 효율성에 영향을 미치고 2) 알칼리도가 추출과 산미 인지에 영향을 미치고, 3) 성분의 변화가 향미의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추측하는 정도다.
--- p.302
커피에는 여러 추출 방법이 있다.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편 가장 완벽한 방법은 아직 없다는 의미도 된다. 최고의 원두를 골라, 최적의 로스팅을 했으면 추출까지 완벽해야 하는데, 추출 시 일어나는 변동성은 생각보다 크다. 그만큼 여러 변수가 개입한다. 커피의 향은 0.1%도 안 되는 아주 적은 양이지만, 향미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향은 원래 물에 잘 녹지 않는 성분이라 추출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커피에 녹아든 향기 물질의 종류와 양이 달라지고, 향기 물질이 조금만 달라져도 커피 맛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 p.307
커피의 성분은 매우 복잡하고 성분별로 정확히 어떤 패턴으로 녹아 나오는지에 관한 자료는 없지만, 핵심은 쓴맛의 용해 특성이다. 저온에서는 모든 성분의 용해도가 떨어지지만, 쓴맛과 특히 커다란 크기의 떫은맛 성분의 용해도가 떨어진다. 단순히 쓴맛이 없는 커피가 목표라면 저온에서 추출이 유리하겠지만, 그만큼 향미가 떨어지기 쉽다. 온도가 높을수록 맛 성분도 잘 녹고 향기 성분도 잘 녹는데, 다행히 분자가 커서, 입안에 오래 남는 쓴맛과 떫은맛 물질이 느리게 추출된다. 추출은 이런 물질이 과도하게 빠져나오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맛과 향 물질을 많이 뽑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보통 온도가 92℃가 넘으면 급격히 쓴맛이 녹아 나오는 경향이 있으므로 고온에서는 추출 시간을 짧게 해야 한다. 저온이라면 많은 성분이 녹아 나오도록 시간을 길게 가져야 한다.
--- p.318~319
내가 식품을 공부하다 보니 용해도를 이해하는 것이 식품 공부의 최종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맛과 향은 향미 물질의 첨가만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있지만, 물성은 식품에 존재하는 모든 분자가 관여하고 분자 레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조금만 깊이 있게 이해하고 다루려고 하면 끝없는 공부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커피의 추출도 마찬가지다. 컵에 적당히 분쇄한 커피를 넣고, 커피 무게의 18배 정도의 뜨거운 물을 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커피가 되지만 거기에서 조금만 욕심을 내서 왜를 파고 들다 보면 ‘용해도의 이해’라는 넘을 수 없는 절벽과 마주치게 된다.
--- p.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