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제로(zero), 즉 0에 대한 이야기다. 0이 고대에 출현해 동양에서 성장과 번영을 이루고, 유럽 사회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서양에서 맹위를 떨치면서 현대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위협이 되어온 역사를 다룬다. 이는 또한 신비한 숫자 0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했던 학자, 신비주의자, 과학자, 성직자 등이 펼쳤던 힘겨운 투쟁의 기록이자, 동양의 아이디어를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거부했으나 결국은 실패한 서양의 헛된 노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 순박해 보이는 숫자가 금세기 가장 탁월한 지성들까지도 뒤흔들고 과학적 사상의 전체 틀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역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Chapter 0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비할 데 없이 막강한 숫자」중에서
수의 값은 수직선에서 다른 수들과 비교된 위치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2는 1의 뒤와 3의 앞에 있으며 다른 곳에 있으면 2가 아니다. 하지만 처음에 0의 기호는 수직선에서 어떤 위치도 갖지 못했다. 그냥 기호였을 뿐이라 수의 서열 속에서는 아무 곳에도 놓일 수 없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는 0이 독자적인 값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때로 수가 아닌 것처럼 취급하여 숫자 0을 수 0과 아무 관련이 없는 듯 자리 기호로 사용한다. 전화기의 다이얼이나 컴퓨터 키보드의 위쪽에 있는 숫자 키들을 보자. 0은 자기 자리인 1 앞이 아니라 9 다음에 온다. 자리 기호로서의 0은 어디에 있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수의 배열 가운데 어디에나 놓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0이 명확한 독자적 값을 가지므로 수직선 위에서는 아무 곳에나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0은 양수와 음수를 가르는 수이다. 0은 짝수이며 1의 앞에 온다. 0은 수직선 위에서 -1과 +1 사이라는 분명한 위치에 있어야 하며 다른 곳에 있으면 0이 아니다. 그런데도 0이 전화기 다이얼의 아래와 컴퓨터 숫자 키들의 끝에 있는 이유는 우리가 뭔가를 셀 때는 항상 1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Chapter 1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뒤흔들다」중에서
하루의 첫째 시간은 자정의 0초부터 시작하고, 둘째 시간은 오전 1시부터 시작하며, 셋째 시간은 오전 2시부터 시작한다. 곧 우리는 첫째, 둘째, 셋째라는 방식으로 서수를 이용하여 세면서, 시간은 0, 1, 2라는 기수를 이용하여 나타낸다. 이것이 맞는 방법이건 잘못된 방법이건 우리 현대인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익숙하다. 아이가 태어난 뒤 열두 달을 보내면 한 살이라고 말하는데, 이처럼 1년을 살고 난 후에야 한 살이라고 한다면, 아직 이 시점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은 0살이라고 하는 게 일관성 있는 선택이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6주가 되었다거나 아홉 달이 되었다고 말하며, 0살이라는 어색한 표현을 피하면서 현명하게 대처해왔다.
---「Chapter 2 무는 무에서 나왔다」중에서
제로(zero)라는 말에서도 인도와 이슬람의 뿌리가 감지된다. 이슬람인은 인도숫자와 함께 0도 받아들였다. 0의 인도 이름은 공(空)을 뜻하는 수냐(sunya)였는데, 아랍으로 건너와 시프르(sifr)가 되었다. 서양의 몇몇 학자는 새로운 이 수를 동료 학자에 소개하면서 라틴어 발음과 유사하게 시프르를 제피루스(zephirus)라 썼고 이것이 오늘날 제로(zero)의 어원이 되었다. 다른 서양의 학자들은 그다지 심하게 바꾸지 않고 시프라cifra라고 불렀으며 여기서 사이퍼(cipher, 암호)라는 말이 나왔다. 이 새 숫자 표기법에서 0은 워낙 중요했기에 사람들은 다른 숫자들까지 모두 사이퍼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숫자를 뜻하는 프랑스어 시프르(chiffre)는 여기서 유래했다.
---「Chapter 3 험난한 여정 끝에 거둔 승리」중에서
데카르트에게 0은 무한과 마찬가지로 신의 영역을 의미했다. 예수회 교육에 충실했던 데카르트는 옛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0과 무한을 이용해 신의 존재에 대한 예전 증명 방식을 대체하려고 노력했다. 고대인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는 지식을 포함한 모든 것이 무에서부터 창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든 생각, 철학, 관념 및 발견이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뇌에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움은 단지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우주 운행의 법칙을 해독해가는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 마음속에 무한한 완전 존재에 대한 개념이 있으므로, 데카르트는 이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인 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모든 존재는 신보다 못하고 유한하며, 신과 무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무한대와 0의 조합인 것이다.
---「Chapter 4 무한, 무, 진공 그리고 신의 존재」중에서
미분 방정식은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적인 수식들과 다르다. 일상적인 수식은 어떤 수를 넣어주면 다른 수를 내놓는다는 점에서 기계와 같다. 미분 방정식도 일종의 기계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수식을 넣어주면 다른 수식을 내놓는다는 점이 다르다. 예를 들어 ‘공이 등속으로 움직인다’라거나 ‘공에 힘이 가해진다’와 같이 주어진 상황에 관련된 조건을 묘사하는 수식을 넣으면 ‘공이 직선으로 움직이거나 포물선으로 움직인다’와 같은 얻고자 하는 답이 담긴 수식이 나온다. 이처럼 하나의 미분 방정식이 셀 수 없이 많은 수식 법칙을 지배한다. 나아가 미분 방정식은 소소한 수식 법칙들처럼 때로는 성립하고 때로는 성립하지 않는 게 아니라 언제나 성립하므로 보편법칙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우리는 대자연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Chapter 5 무한개의 0과 신앙심 없는 수학자들」중에서
0과 무한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등하지만 반대이고, 음과 양이며, 수의 영역 양극단에서 동등한 힘을 갖는 맞수이다. 골치 아픈 0의 속성은 무한대의 기이한 힘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0을 연구하면 무한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를 밝히기 위해 수학자들은 원이 선이 되고, 선이 원이 되며, 0과 무한대가 양극에 자리 잡은 환상의 세계를 탐험해야 했다.
---「Chapter 6 무한대의 쌍둥이」중에서
수학자들이 0과 무한대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는 동안 물리학자들도 자연에서 0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0은 수학을 넘어 물리학으로 건너왔다. 열역학에서 0은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가능한 가장 낮은 온도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0은 별들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괴물 같은 블랙홀이 되었다. 양자역학에서 0은 무한하고 어디에나 있으며 심지어 가장 깊은 진공에도 존재하는 기이한 에너지의 원천이며, 무에 의해 행사되는 유령과 같은 힘의 근원이기도 했다.
---「Chapter 7 절대적인 숫자 0」중에서
0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나란히 놓인 곳에 존재한다. 0은 두 이론이 만나는 곳에 살면서 두 이론을 충돌시킨다. 블랙홀은 일반상대성이론의 방정식에 내포된 0이며, 진공 에너지는 양자역학의 수학에 나타나는 0이다. 우주 역사상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건인 빅뱅은 두 이론 모두의 0이다. 우주는 무에서 나왔는데 두 이론 모두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 빅뱅을 이해하려면 물리학자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결합해야 한다. 물리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하여 몇 해 전부터 상당한 성과를 얻었는데, 그 결과 중력의 양자역학적 본질을 해명하는 괴물 같은 이론이 만들어져서 우주의 창조 자체를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그들이 해야 했던 것은 0을 추방하는 것뿐이었다.
---「Chapter 8 빅뱅의 0시와 블랙홀의 그라운드 제로」중에서
물리학의 커다란 수수께끼 뒤에는 항상 0이 있다. 블랙홀의 무한한 밀도는 0으로 나누기다. 무에서의 창조를 낳은 빅뱅도 0으로 나누기다. 진공의 무한한 에너지도 0으로 나누기다. 하지만 0으로 나누는 것은 수학의 막을 찢고 논리학의 틀을 망가뜨린다. 나아가 과학의 근저 자체를 약화하는 위협이 된다.
---「Chapter ∞ 제로의 최종 승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