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탁자 위에는 사과와 함께 설탕그릇이 자주 등장한다. 사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당도가 높아진다. 가지에 달렸든, 가지에서 떨어졌든 말이다. 그 사과의 단맛을 얼마나 오랫동안 눈으로 깨물고, 코로 맡았을까? 쭈글쭈글 말라 비틀어질 때까지 사과를 관찰하고 그리던 화가의 몸도 덩달아 당도가 높아졌다. 화가는 1890년 당뇨로 진단받고, 풍경이 정물화처럼 고요한 시골로 숨어 들었다. 어쩌면, 4년 전에 아버지가 남긴 풍족한 유산이 당뇨에 독이 됐을까? 당뇨로 쇠약해지는 몸이 사과처럼 쪼그라드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서서히 짙어지는 죽음의 ‘단맛’을 직감한 세잔은 해골을 그리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사과 옆에 ‘당도’가 짙은 해골이 등장했다가, 사과가 사라지고 해골이 피라미드처럼 쌓였다. 사과의 공간을 해골이 대체하는 걸까? “맹세코, 나는 그리다가 죽을 것이다”(I have sworn to die painting). 1906년 10월, 쇠약한 몸을 끌고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불어 닥친 비바람에 갇혔다. 그림도구를 챙겨 서둘러 돌아오다가 폭우 속에 쓰러졌다. 마침 지나던 우편마차에 실려 돌아온 세잔은 저체온증으로 기관지염이 폐렴으로 악화됐다. 왜 그랬을까? 이틀 뒤 또 그림을 그리러 나섰다가 다시 쓰러졌다. 화가는 사라지고 사과만 남았다. 향년 67세.
---「단맛 짙은 사과를 그리다가 당뇨에 걸린 폴 세잔」중에서
어릴 때 익힌, 옷에 대한 분별은 결국 정신병으로 나타났다. 세자는 새옷을 싫어하다 못해 두려워했다. 옷 한 벌 입히기 위해 열 벌 넘게 지어 올렸다. 새 옷을 귀신이라 여겨, 이 탓 저 탓 하며 몇 번을 입어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태워버렸다. 간신히 한 벌을 입으면 다 해질 때까지 입었다.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의대증(衣帶症)이다. 의관을 갖추면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강박장애다. 옷을 입을 때마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시중 드는 나인들을 매질하거나 불로 지졌다. 다들 꺼려하는 옷 입기를 도와주러 세자빈 혜경궁 홍씨까지 나섰지만, 바둑판을 던져 얼굴이 퉁퉁 붓도록 만들었다. 내관을 죽인 뒤 그 머리를 들고 다니는가 하면, 하루에 여섯 명을 죽이기도 했다. 아끼던 후궁 경빈 박씨마저 때려 죽이고 박씨와 낳은 아들 은전군까지 연못에 던졌다. 세자를 싫어하던 노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1762년 7월 세자가 반란을 모의한다는 노론의 귀띔에, 세자를 꿇리고 곤룡포를 벗긴 영조는 아들의 옷을 보고 격노했다. 부모가 죽으면 입는 상복을 아들이 왜 걸치고 있냐는 것이다. 세 살 때 배운 대로, 세자는 사치스럽지 않은 무명옷을 좋아했다.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잇단 3년상이 끝나도 아예 무명옷을 속옷처럼 입고 다니던 때였다. 무명옷은 그대로 세자의 상복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학대로 옷을 두려워한 사도세자」중에서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불붙은 성화를 세계 각국을 두루 돌며 옮기다가, 개막식에서 성화대에 불을 붙이는 순간은 올림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주경기장에서 성화를 받은 마지막 주자가 성화대에 붙인 불이 기세 좋게 화르르 타오른 모습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멋진 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가장 큰 감동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주자는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성화를 전달받고 제자리 걸음하다시피 몸을 반쯤 돌려 가까스로 성화를 지폈다. 움직임이 굼뜬데다 어색하게 늘어뜨린 왼팔을 덜덜 떨었다. 몸통은 물론 다리와 얼굴까지 후들거렸다. 하지만 성화봉을 쥔 오른손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성화가 타오르는 순간, 8만 관객의 환호와 함께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던 무하마드 알리가 50대 중반의 나이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모습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파킨슨병의 잔 펀치에 무너진 무하마드 알리」중에서
척추측만 재활에 너무 몰두해서 그럴까? 맥아더는 갈수록 꼿꼿해졌다. 국방예산을 놓고 루즈벨트 대통령과 언쟁을 벌이고, 한국전쟁 작전에서 트루만 대통령에 반발하기도 했다. 차림도 꼿꼿했다. 짙은 선글라스에 근엄하고 절제된 군복이다. 술과 담배도 별로 즐기지 않았다. 옥수숫대로 만든 콘콥(Corn Cob) 담뱃대를 즐겨 물었지만, 흡연은 그리 많이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꼿꼿하고 도도한 태도는 의료진마저 긴장하게 만들었다. 담석증으로 병원에 입원할 때, 의료진은 환자에게서 제대로 혈압을 재거나 피를 뽑을 수 있을까 걱정했을 정도다. 역시 환자는 꼿꼿했다. 황달의 그 심한 가려움에도 몸에 긁은 자국이 거의 없었다. 쓸개를 제거하는 수술도 계속 반대했다. 평생 건강했던 맥아더에게 수술은 ‘항복’을 의미했기 때문일까? 미루고 미루다 받은 수술에서 큰 콩알만 한 담석이 여럿 나왔다. 꼿꼿함의 대가였을까? 수술이 성공적인가 싶더니, 얼마 지나자 식도에서 계속 피가 새어 나왔다. 심각한 증상이 온몸으로 확산되면서 24일 동안 수술을 2번 더 받았지만, 1964년 4월 그 유명한 연설처럼 ‘노병은 사라졌다’(Just fade away). 향년 84세. 사인은 급성 신부전과 간부전.
---「항복을 죽기보다 싫어한 마마보이, 더글라스 맥아더」중에서
‘모델하우스’ 같은 집에서 니체를 돌본 누이는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였다. 오빠의 글을 짜깁기 해서 파시스트의 입맛에 맞춰 출간한 것이다. 나치를 싫어하던 전문가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음습한 매독의 딱지를 붙여버렸다. 하지만, 니체는 일찌감치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몸은 그대의 철학보다 더 많은 지혜를 품고 있다’(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 나쁜 시력은 두통을 낳고, 두통은 뇌종양으로 이어졌다. 니체는 시력은 안경으로 보완하고, 두통은 산책으로 돌파하고, 뇌종양은 사유로 넘어섰다.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시간은 짧지만, 사유할 시간이 풍부했기에, 그의 문체는 구체적인 묘사나 설명보다 추상적인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가 내뱉는 명제나 잠언 같은 짧은 아포리즘(aphorism)은 어렵다. 그 날, 차라투스트라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꼼짝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뚝 선 말을 보았다. 잔혹한 채찍에 복종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는 말을 보며, ‘두통의 망치’에 두들겨 맞고 괴로워하는 자신이 부끄러웠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왜 그랬을까? 자신의 운명을 사랑했을까? 인간이 위대해지려면,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외쳤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
---「뇌종양을 앓으면서 ‘아모르 파티’를 외친 니체」중에서
여느 천재와 달리 오펜하이머는 오래 앉아 집중하는 ‘엉덩이 힘’이 부족했다. 불안하고 우울한 성격 탓이다. 오히려 흡연이 숨을 쉬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을까? 일찌감치 10대에 흡연에 빠져들어 30대에 결핵에 걸렸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줄담배를 피워댔다. 말도 빨리 하고 연기도 쉽게 내뱉았다. 꽁초까지 타도록 들고 있다가 비벼 끄면서 재빨리 다른 한 개피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피워댄 담배가 하루에 5갑이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하면서 무려 12만 명이 죽었다. 불안하고 우울할 때 그리스나 라틴어는 물론 심지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고전까지 탐독하던 그였다. 사상 최악의 참사를 전해 들은 오펜하이머에게 힌두 경전의 두려운 저주가 떠올랐다. “이제 나는 세상을 파괴하는 죽음의 신이 된다”(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엄청난 살상을 확인하고 못내 견딜 수 없던 그는 “내 손에 피가 묻었다”라며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죄책감을 호소했다.
---「‘세상을 파괴하는 죽음의 신’이 된 로버트 오펜하이머」중에서
최고의 지성인들이 왜 그녀에게 빠져 헤어나지 못했을까? 루는 강렬한 눈매와 줏대가 강한 코와 두툼한 입술로 얼굴이 분명한 반면, 목이 길고 허리가 가늘어 몸은 전체적으로 가냘퍼 보였다. 니체가 비겁하게 ‘꼬집은’ 볼품없는 가슴도 약점이다. ‘팜파탈’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전혀 아니다. 남성 지성인들은 그녀가 뿜는 이지적인 매력에 황홀한 ‘지적 오르가슴’을 경험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루는 남자를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다. 짝사랑에 치인 지성인들은 바위처럼 끄덕하지 않는 그녀에게 부딪혀 달걀처럼 깨졌다. 정신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거나, 칼부림이나 자살 같은 극단적인 몸부림을 보이기도 했다. (…) 짝사랑의 저주가 말년에 쏟아진 걸까? 허리통증에 이어 당뇨와 심장질환과 유방암 같은 온갖 질환들이 몰려와 달달 볶아 댔지만, 지성의 ‘뮤즈’는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오랜 병고 때문일까, 나치의 박해 때문일까, 아니면 삶에 대한 최종 결론일까? 요독증을 앓다 1937년 편안하게 눈을 감은 루의 유언은 간명했다. “최선은 결국 죽음이군”(The best is death, afterall). 향년 76세. 그런 그녀에게 유방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루는 일흔네 살에 한쪽 유방을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도 태연했다. “니체가 옳았어. 지금 이렇게 가짜 가슴을 달고 있잖아.”
---「유방암도 두 손 든 루 살로메의 가짜 가슴」중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질병!’ 마르크스는 자신이 앓는 병이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내린 천형이라 여겼다. 런던의 열악한 환경이나 더러운 다락방의 석탄아궁이는 그럴 수 있지만, 술과 담배는 자신이 절대 양보하지 않는 기호품이었다. ‘자본론’을 탈고하면서, 허옇게 부푼 수염 사이로 누렇게 찌든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자본론’으로는 이걸 쓰느라 피워댄 시가 값도 안 나올 걸세.” 부스럼은 가엾은 마르크스를 가장 괴롭힌 질환이다. 그가 보낸 편지 곳곳에 부스럼 때문에 겪은 고통이 구구절절 드러난다. 마흔 중반 들어 발에 나기 시작한 부스럼이 등으로 옮아갔다가 뺨으로, 다시 등으로 되돌아왔다. ‘두더지 잡기’처럼 짜증나게 힘들었을까? 결국 부스럼은 겨드랑이, 허벅지, 사타구니, 항문 주위로 번져 그의 온몸을 지배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배회하는 ‘유령’처럼! ‘주먹 크기’로 부푼 부스럼에 좌절한 마르크스는 스스로 면도칼을 들고 부스럼을 찌르거나 도려내기도 했다. 엉덩이가 아파 앉지도 못하고, 서서 집필을 이어갔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는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온통 부스럼으로 시련을 겪은 구약성서의 의인 욥을 떠올렸다. ‘나는 욥만큼 고통을 받고 있다네. 단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마르크스가 앓은 부스럼은 ‘화농성 땀샘염’(한선염)일 가능성이 높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부스럼에 시달린 마르크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