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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내게 숨이었다

: 한 모금의 환상이 불러온 이야기

리뷰 총점10.0 리뷰 7건 | 판매지수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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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3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04g | 125*188*15mm
ISBN13 9791155251720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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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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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어른들이 쳐다보고 있던 벽은 어쩌면 하나의 신이었을까? 벽면 앞에 앉은 모두의 기분과 인생을, 그들의 돈과 그들의 욕심과 그들의 희망과 절망 같은 것들을, 그들의 삶과 죽음을 모두 손에 쥔 절대 권력자가 그 벽에 펼쳐져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계속 바뀌는 저 많은 숫자는 도대체 누가 결정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쳐다보고 있어도 나로서는 규칙을 읽어 낼 수 없던 숫자들의 빠른 들고남이 어지럽기만 했다. 너무 차갑고 너무 이상하고 너무도 재미없던 그 벽. 그러나 누군가는 그 벽 앞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간절히 두 손 모으고 침을 삼켰으리라.
인생에는 때로 그런 벽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고 나서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구원해 줄 환상의 벽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언제나. 어쩌면 언제까지나. 우리에겐 눈부신 벽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을.
--- p.54

의사는 뼈가 원래대로 붙지 않더라도 사는 데 무방할 거라는 소견을 슬쩍 흘렸다. 부러진 뼛조각이 너무 작아 다시 붙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뼛조각이 신경을 건드리거나 목숨에 지장을 주는 일은 없을 거라고도 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그냥 살아도 괜찮을 거라는 의사 말이 재밌게 들렸다.
좋은 삶이란 진단코드를 받거나 완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를 찍어 보는 것처럼 설명할 수 있는 것들에 의한 게 아닐지도 몰랐다. 어떤 시간의 필요를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견뎌 내려는 마음만으로도 좋은 삶일지 몰랐다. 끝내 뼈가 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계속 깁스 신발을 신고 다녀 보는 마음. 그것이 진짜 중요한 일일지도 몰랐다.
---p.91

어떤 말이든 앞에 ‘평범한’을 붙이면 그 말의 중심이 내부에서 외부로 이동한다. 평범한 월 평균 수입, 평범한 성격이나 가치관, 스트레스를 해결하는 평범한 방법, 평범한 주말 아침 메뉴를 떠올려 보라. 분명한 의미를 가진 단어 앞에 ‘평범한’을 붙였을 뿐인데 순식간에 하나 마나 한 아무 뜻도 없는 단어들이 된다.(여기서 ‘평범한’을 ‘당신의’로 바꾸면 말의 중심이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 오고 의미가 선명해지며 말이 형체를 띠기 시작한다.)
잘해야 얻게 되는 건 누군가의 허락, 어딘가로의 통과가 전부다. 즐거움이나 몰입과는 거리가 멀고 닿을 수 있는 최고 지점에 ‘안도감 확보’ 정도가 있을 뿐인 애처로운 단어. 그러니 평범함이란 얼마나 닿기 불가능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란 말인가.
---p.109

어떤 물은 아주 차갑고 어떤 물은 너무 뜨겁다는 사실은 어찌나 우리의 삶과 닮았는지. 이보다 더 느긋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릿느릿 얼굴에 뭔가를 찍어 바르고 있는 사람들과 옷의 일부만 걸친 채 평상에 앉아 TV 속 노래 자랑 무대를 보거나 갑자기 일어서서 귀지를 파는 사람들이 있던 곳. 웃고 싶어 온 사람들과 울고 싶지 않아 온 사람들이 맨살로 스쳐 가고 있다. 나는 커피우유를 두 손에 꼭 쥐고 포장 용기를 살살 눌러 가며 엄마를 기다린다.
---p.116

아이 곁에 빠르게 다가온 의료진들이 이런저런 장치들을 아이 몸에 서둘러 연결하고 아이의 인큐베이터는 제가 있던 자리에 다시 놓인다. 그 장면을 멀찍이 복도에서 보고 있으면 아이의 집은 저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 저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럴 때 실감했다.
그런 날엔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전 연세대학교 정문 앞 횡단보도를 건너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인이 든 커피를 마시고 나면 가슴 한쪽에 이십 분씩, 양쪽 가슴을 번갈아 손에 쥐고 유축한 모유를 두세 번쯤 버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바닐라라테를 기어이 한 잔 사 마셨다. 그러면 조금 전 아이 주치의에게 들었던 이야기 같은 것을 잠시 잊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p.135

실로 많은 날들 나를 지켜 주었던 커피였다. 내 안에서 폭발하고 있는 ‘미충족된 인생 통제 욕구’를 어딘가에 풀려고 할 때마다 커피가 나를 설득했다. 가까이 있는 누군가 혹은 멀리 있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들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면서 나의 존재를, 나의 가치를, 나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그 지독한 자기애와 유아적 전능감 모두를 그 작은 커피 한 잔이 끌어안아 주곤 했다.
---p.204

단 하루 만에 내게 일어날 수 있을 일들의 스케일이 나를 겁준다. 아주 작고 사소해 보였던 선택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틀었음을 깨닫게 될 순간이 두렵다. 단 몇 분만의 발작으로도 사람은 사지가 마비되고 눈이 멀 수 있다는 사실이, 한순간에 사람이 죽거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걸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커피 한 잔 손에 쥐고 있으려던 나의 집요함은 ‘그럼에도 살기로 선택한 이가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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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열기 전, 아주 뜨거운 커피를 한 잔 앞에 둔 기분이었다. 원인 불명의 뇌손상으로 사지마비와 시력 상실 진단을 받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커피에서 숨 쉴 구멍을 찾는 이야기다. 선뜻 마시지 못하는 내게 프롤로그는 얼음 한 알 같았다. 입천장을 데지 않고 첫 모금을 넘기는 데 성공. 이 산뜻하고 쌉싸름한 맛은 뭐지? 본문은 홀짝홀짝 잘도 넘어간다. 잠든 정신을 일깨우는 카페인 같은 문장들이 찰랑인다. ‘언제까지고 아플 아이의 엄마’라는 엄마 되기의 극한을 견뎌 낸 경험의 무게가 실린 언어는 묵직하고, 오늘의 커피를 떠올리며 살아 있기로 결심한 사람의 순정은 향기롭다. 심리학 전공자의 예리함은 끝맛의 여운을 끌어올린다. 에필로그를 덮고 나니 바닥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잘 마셨구나 싶어 흡족하다.

나는 이 책에서 좋은 커피가 주는 여러 맛의 충돌과 조화를 경험했다. 엄마, 커피, 인생은 닮았다. 한 가지 맛으로 정리되지 않는 복잡함의 풍미를 살려 낸 글이 나를 어루만졌듯이 당신의 숨 가쁜 하루도 ‘잠시 머물 수 있는 괜찮은 세계’로 데려갈 것이다.
- 은유 (르포 작가, 《해방의 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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