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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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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3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128*188*14mm
ISBN13 9791156626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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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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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온몸을 도는 이 서늘함이 알지 못하는 이의 피 때문인지 아버지의 말 때문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 「당신」 중에서

눈이 내리고 그 눈이 꽃처럼 휘날립니다. 무엇이 눈이고 무엇이 꽃인지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당신을 버리고 얼굴마저 지운 죄를 품고 그저 오늘은, 먼저 죽은 그이를 만나러 가기에 완벽한 날입니다.
--- 「당신」 중에서

어두운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야생에 대해 생각했다. 경련처럼 찾아오는 그 순간을, 힘들게 거역하던 그 시간을 떠올렸다. 나의 야생은 낯설고 거칠며 축축하고 아득했다. 타성에 잠겨 있던 나의 일상은 그것이 밀어 올리는 부력에 의해 붕 떠올랐고, 그 한 조각의 기억은 간신히 지탱하던 삶의 균형을 일순간 무너뜨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기쁜지 슬픈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것이 실은 거대한 실체를 숨기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안다. 사납고 거센 고요가, 온 집 안에 가득하다.
--- 「야생의 시간」 중에서

연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커다란 나무 하나를 제 안에 들이는 일임을, 선배가 죽고 나서 알게 되었다. 있는 줄도 모르고 잊고 있던 나무가 아무 때라도 밑동을 꿈틀거리며 되살아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가 자욱한 산길을 지날 때,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 석양이 질 때,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올 때도 나무는 제멋대로 꽃을 피웠다. 그 꽃은 무던히도 피어나서 연희의 몸 안에서 터질 듯 만개했다. 그러고는 일순간에 모가지를 부러뜨리며 떨어졌다. 꽃이 진 자리마다 선배가 맺혔다. 그렇게 연희는, 아무도 모르게 선배의 사원이 되어갔다.
--- 「부겐빌레아 속으로」 중에서

나는 나의 부모가 부끄러웠고 그런 부모가 나를 사랑해서 평생, 내가 부끄러웠다.
--- 「엄마의 진심」 중에서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사랑이 똬리를 틀고 밑바닥에 자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간과 공간이 더해져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상의 변형과 변주일 뿐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모두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언뜻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소설조차 그렇다. 나는 사랑의 열렬한 지지자이고, 언제나 상처 입은 자들의 편이다. 앞으로 쓰일 나의 소설도 그것에 부상당한 이들에 관한 넓고 아득한 탐구가 될 것 같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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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언젠가, 잡지에 실린 이화정의 소설 한 편을 읽고 연락처를 문의해 그녀의 소설을 모두 메일로 받아 읽어본 적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훈문학상 소식을 접했다. 내 안목이 그른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보다 이 작가의 진면목이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이화정 소설에서 처음 발견한 것은 타고난 천품의 문장력과 서사를 궁굴리는 보기 드문 스케일이었다. 작품의 스펙트럼도 넓어 본격소설부터 장르까지 아우를 수 있는 넉넉한 품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은 이화정의 작가 인생에서 싹을 틔우고 산성화된 한국소설문학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으로 생장해야 할 21세기적 가능성의 지표이다. 기념비가 아니라 초석이 되길 비는 마음, 더 크고 웅숭깊은 이화정 소설문학의 미래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 박상우 (소설가)
이화정의 작품 세계는 우선 단문 연결로 이뤄진 문체가 눈길을 끈다. 트라우마와 연결하여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깊이 있게 자아내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탐독하는 동안 심사자의 호흡이 문장 전개에 맞춰 조절되는 체험도 오랜만에 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화정의 강한 개성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 구모룡·방현석·홍기돈 (심훈문학상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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