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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 시인선-055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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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1997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88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32029856
ISBN10 8932029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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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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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귀국해서 친구랑
촌길 주점에서 도토리묵을 먹은
그해의 시월은 즐거웠다.
빨간 고추밭 사이 들깨 터는 소리,
긴 수숫대 돌아가는 고추잠자리,
한국식 잠자리 순한 눈 때문에
내 온몸은 간지러웠지마
나가 사는 의사니까 알았어야지
간지러움은 얇은 아픔인 것을.
그해의 시월은 아팠다.

어릴 적에도 코스모스가 있었다.
피난 시절은 어른들의 먼지 속,
전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나이에
나는 아침부터 심심하게 배만 고프고
싸구려 목판의 술찌꺼기 먹고
메스꺼워 비틀거리던 행자의 발
지천의 코스모스가 종일 흔들리던
그해의 시월은 어지러웠다.
--- p.11
내가 외국의 대학촌에서 공부할 때
자유의 피라는 것을 배웠지.
젊은 나라에서 그 젊은 여자는 웃으면서
자유가 얼마나 좋은가를 알려 주었지.
그때만은 임신이 안 되는 게 확실해서
며칠이고 약을 안 먹어도 되는 자유
당신도 껴안고 뒹굴 수 있는 자유,
그런 종류를 자유라고 자유롭게 불렀어.
내가 고국에서 배운 자유의 피는
아주 무겁고 힘겨운 것으로 기억했을 때라
무한정 흔들며 자유의 피를 뿌리는
그 여자의 여유가 가볍고 싱싱하게 보였지.
그렇지만 나는 확실히 믿을 수는 없었더.
갑자기 자유의 피가 하룻밤 일거리가 되는 것이
아무리 힘있게 껴안아도 믿을 수가 없었어.

몇 해마다 내 갈증을 풀려고 고국에 돌아오면
아직도 서울의 공기는 수상한 냄새를 풍기고
서울의 공기는 수상한 소리를 연발하고
남산 밑으로 많이 뚫린 터널에서도
나는 성욕 잃은 쥐같이 재채기만 했었지.
서울 친구들은 장중하고 슬프게 발음하면서
자유라는 말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어.
물론 나는 내 친구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아, 때때로 자유의 피의 황홀한 색감,
자유의 피의 황홀한 율동!
자유가 속삭임같이 달콤해지면
다시는 그 많은 재채기를 안 해도 될 것 같았어.
--- pp.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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