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미끄럼틀은 유난히 높았다. 동생은 올라가지 않으려고 했다. 오빠의 씩씩함을 보여주리라! 올라가 보니 과연 높기는 높았다. 디자인도 조금 별났다. 미끄럼틀의 마지막 부분은 보통 평평한데, 그 미끄럼틀은 끝나는 부분이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하지만 그 높은 미끄럼틀 위에서 저시력인 내게 제대로 보일 리 없었다. 결국 신나게 내려오다 끝 부분에 얼굴을 정통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눈 앞에 불이 번쩍했다. 미끄럼틀이 높으니 내려오는 속도도 그만큼 빨랐다. “오빠야, 피난다!” 옆에서 구경하던 동생이 깜짝 놀라서 연신 외쳤다. 사실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래도 동생이 피가 난다며 가자고 하길래 놀이터를 나섰다.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 거울에 얼굴을 들이댔다가 기겁했다. 코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 p.18
그날 저녁 야간 자습 시간에 담임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선생님은 컴퓨터에 내가 읽을 수 있는 큰 글씨로 타이핑을 쳐 미술 시간에 어디 갔었냐고 물었다. 아무 대답도 못했다. 선생님이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과학 선생님 사정으로 시간이 변경되었는데 몰랐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또 그런 일이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다. 난 고개만 끄덕이다가 한마디도 못 하고 교실로 돌아왔다. 자습시간이라 조용한 교실 뒷문으로 들어가 맨 앞 내 자리로 가는데,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때 분명히 봤다. 비웃음과 조롱, 놀림이 뒤섞인 얼굴들.
그제야 직감했다. 수업 시간이 변경된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건 ‘고의’였다. 쉬는 시간에 소설에 빠져 있지 않았다면 아이들이 스케치북 챙기는 걸 보고 눈치챘을 것이다. 분명 누군가는 알려주려고 했지만, 몇몇이 못 하게 했을 게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단체로 벌을 설 때도 제외되고, 이런 저런 배려를 받아 시기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 p.59
확대 문제지도 말만 ‘확대’일 뿐 독서확대기를 써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저시력 장애인이 보기 편한 글자체도 아니었고, 글자 크기도 너무 작았다. ‘확대’란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객관식 문항의 문제와 지문의 글자체가 다른 것도 불편했다. 가령 문제가 굵은 고딕체라면 지문은 가는 바탕체로 되어 있다. 비장애인은 큰 어려움이 없을지 몰라도, 시력과 시야가 천차만별인 저시력 시각장애인에게는 글자체가 다르면 매우 불편할 수 있다. 예컨대 영어의 굵은 고딕체는 알파벳 ‘e’의 가로선(-)이 가늘고 ‘c’ 부분은 굵다. ‘e’가 아니라 ‘c’로 읽기 쉽다. ‘eat’를 ‘cat’로 읽은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리 공부해도 안 될 것 같아서 법원직 공무원 시험을 주관하는 법원행정처에 민원을 냈다. 확대 문제지를 제공할 거라면 더 크게 확대해주세요, 문제와 지문의 글자체를 통일해주세요, 장애인이 시험을 제대로 볼 수 있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주세요. 대답은 ‘노(no)’였다. 법원행정처에서 정한 기준이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 p.79
그날 밤 이웃들에게 편지를 전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위층으로 올라가는데 마음속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들렸다. 한 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정말 이래도 괜찮아? 잘못하면 여기서 쫓겨날 수도 있는데, 이러면 안 돼.’ 다른 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첼로를 계속 연습하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돼.’ 억지로 용기를 냈다. 이웃집 문틈에 편지를 꽂는 손이 덜덜 떨렸다. 모든 집을 돌며 문틈마다 편지를 꽂아두고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왔다. 심장이 세차게 뛰는 게 느껴졌다.
그날 밤부터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이웃들은 저마다 몇 호라고 밝히면서 응원해주었다. 마음껏 연습하라고, 얼마든지 연습하라고. 너무 고마웠다. 그중에서도 정말 감동적인 문자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인생의 즐거운 한 부분을 마음껏 즐기지 못해서 속상하시겠어요. 편지 잘 받았고요. 이웃님이 듣지 못하는 첼로의 소리, 제가 대신 들어드리겠습니다.”
--- p.102
두 번째 영어 시간에 선생님은 또 ‘손들어!’를 했다. 이번에도 내가 걸렸다. 선생님의 “손들어!”라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손을 들어보지도 못한다. 이번에도 선생님은 나를 앞으로 나오게 해 등짝을 때리셨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벌로 등짝을 맞고도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나도 억울하지 않았다. 고3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 학급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영어 시간만 되면 앞으로 나가서 등짝을 맞았다.
그날도 선생님은 ‘손들어!’를 하셨다. 나는 등짝을 맞기 위해 당당히 앞으로 나갔다. 교탁 가까이 다가가는데 불쑥 친구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제가 관찬이 대신 등짝을 맞겠습니다.”
잠시 우리를 번갈아 보던 선생님은 나를 자리에 들어가라고 손짓하시고 그 친구의 등짝을 한 대 때리셨다. 자리로 들어가면서 나 대신 등짝을 맞는 것을 보고 또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무슨 상황인가? 자리에 들어와서 짝에게 왜 쟤가 등짝을 맞느냐고 물어보니, 나 대신 맞겠다고 했단다. 너무 고마웠다. 쉬는 시간에 그에게 가서 고맙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 p.132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버스는 계속 달리고 있으니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아야 했다. 한이정 선생님에게 내 뒷좌석에 앉은 분과 통화해서 목적지를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뒷좌석에 앉아 있는 분을 향했다.
“저, 제가 청각장애가 있어서 그런데, 제 지인과 통화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난데없이 앞좌석에 있던 사람이 몸을 돌려 말을 거니 버즈를 귀에 꽂고 음악을 듣고 있던 그분 역시 엉거주춤 자기 폰을 꺼냈다. 제 폰으로 통화하시면 됩니다. 한이정 선생님에게 연결한 후 폰을 건넸다. 통화가 끝났다. 곧 전송되어온 메시지.
그 버스 에버랜드로 간대요!
자유이용권을 손목에 두르고 마음껏 놀이기구를 탈 상황은 아니지만, 그 와중에 웃음이 났다. 세상에나, 어린 시절 정말 가고 싶었던 에버랜드를 이렇게 가게 되는구나!
--- p.214
역설적이지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번호를 확인하기가 더 어렵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이 다가가 번호를 확인하려는데 버스가 출발한다. 앞문을 열어줬는데 타지 않으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버스 옆의 번호를 확인할 여유가 조금이나마 있지만, 아무도 없으면 버스를 놓칠 가능성이 크다. 조금 걷더라도 사람 많은 정류장으로 가는 편이 번호를 확인하고 버스를 타기에 안전하다.
버스 측면에는 광고도 있다. 잘못하면 광고와 번호를 혼동할 수 있다. 버스마다 색깔이 다른 것도 색약이나 색맹이 있는 시각장애인에게는 큰 어려움이다. 물론 디자인이 다양하고 예쁜 것은 중요하다. 광고도 나름 선기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교통수단인 만큼 모든 사람이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용하는 것이 우선이다. 디자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전문가들이 장애인을 고려해 깊이 궁리해본다면 방법이 있을 것 같다.
장애인이 지하철 한번, 버스 한번 타려면 비장애인이 짐작하지 못할 어려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무엇보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이 중요하다. 누구의 지원도 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시내버스를 타보고 싶다.
--- p.237
시험을 코앞에 두고 온 신경이 집중되어 예민한 수험생이 꼭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발급받아야 하나? 이미 장애로 등록했어도, 진단서를 받으러 가면 다시 검사하는 경우가 많다. 쉽게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병원에 가면 바로 검사를 받기도 쉽지 않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병원이 많아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장애 유형이나 정도에 따라 검사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몇 가지 검사를 받는다면 접수하고 대기하고 검사받는 데 적잖은 시간이 소요된다. 거기에 병원에 오가는 시간을 더하면 하루가 꼬박 걸린다.
수험생은 시험이 임박한 상황에서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다. 한 글자라도 더 보고싶다. 장애인이 정당한 편의제공을 받기 위해 병원을 방문하고 검사를 받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그 자체가 비장애인에 비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더구나 진단서를 제출해야 할 정도라면 장애가 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증장애인이라도 장애인 편의제공을 ‘신청’만 하면 되지 시험 칠 때마다 진단서를 내라는 것은 지나친 처사다.
꼭 진단서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시험이 끝난 뒤 증빙자료로 제출하면 어떨까?
---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