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공식을 가르쳐 준 선생님 없이 혼자 공부하고
사랑을 가르쳐 준 첫사랑 없이 혼자 이별하고
술담배 가르쳐 준 형들 없이 혼자 방황하고
실패를 가르쳐 준 시험지 없이 혼자 낙심하고
우정을 가르쳐 준 친구들 없이 혼자 장난치고
교문을 걸어 나가 어른이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다들 어른이 될 동안 나만 교복을 벗지 못했어
--- 「졸업」 중에서
우리 집이 잘살았을 때
그러니까 집도 우리 집이고 아빠 차도 있고
엄마가 일 안 나가던 때
할아버지 할머니가 박스 줍기 안 하던 때
주말마다 아빠와 캐치볼을 했지
운동 끝나고 여섯 식구 모여 앉아 밥을 먹었지
걱정도 고민도 외로움도 없던
내가 가장 행복하던 시절
아빠 사업이 실패하고
차가 없어지고 월세방으로 이사 가고
엄마는 식당에 일 나가고
할아버지 할머니 박스 줍고
동생은 자꾸 가출하고
아빠는 몇 년째 집에 오지 않게 됐을 때
제일 슬픈 건 혼자 먹는 밥
학교 끝나면 어두운 반지하방으로 내려와
부르스타를 켜고 라면을 끓였지
매일 먹는 라면 또 라면 또 또 라면
뜯지도 않은 이삿짐에서 아빠 야구 글러브를 발견한 날
버스 타고 내리고 다시 버스 타고 내리고
겨우 찾아간 어린 시절 동네 운동장
아빠와 함께 캐치볼 하던 자리에 아빠는 없고
여기서 공을 던지다 보면 아빠가 올까
야구공으로 원망스러운 하늘을 부수면
우리 가족 모여 앉아 함께 밥 먹을 수 있을까
있는 힘껏 하늘로 야구공을 던지는데
부서지는 건 눌러쓴 모자 아래 내 눈물뿐
--- 「혼자 하는 캐치볼」 중에서
버스를 타고 간다
기다릴 게 없는 낯선 동네로
기다림이 없어서 기대도 실망도 없는 곳으로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면서
홀로 강둑 위에 서 있다
내가 기다리는 것들은 모두 멀리 있고
나를 기다리는 건 캄캄한 강물 소리뿐
엄마, 아무리 기다려도 나는 갈 수 없어요
내가 어른이 되길 기다리다 지쳐 버린 내 그림자가
나를 붙잡고 어디로도 못 가게 하니까요
--- 「기다림」 중에서
작은 물고기는 놓아주어야 해
나중에 더 커서 만나자고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줘야 해
어린 물고기들까지 전부 잡으면
강과 바다는 말라 버릴 거야
새끼손가락 크기만큼 작은 실수들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일들
조그마한 투정들까지 다 붙잡혀 혼난다면
내 마음도 사막이 되어 버릴 거야
--- 「놓아주기」 중에서
나는 물살 잔잔한 호숫가만 헤엄치며
사랑을 하고 있어, 말하는 놈들을 믿지 않는다
내 사랑은 어리석다 포말이 일어나는 급류
세찬 여울을 온몸으로 견디며
폭포 너머에 있는 너를 향해 끊임없이 뛰어오른다
나는 자리를 옮기지 않아
물 위로 낙엽이 떠내려오고 얼음이 쩡쩡 얼어붙을 때까지
여기서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러나 폭우가 쏟아져 세상이 다 물에 잠긴 여름 방학 아침
나는 원치 않는 물살에 떠밀려
이제 너를 볼 수 없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데
먼 훗날에 나는 멋있어져서 돌아올 거야
아무리 거센 물살이라도 거슬러 올라
네게로 갈 수 있는 튼튼한 물고기가 되어
네 반짝이는 두 눈을 향해 헤엄쳐 갈 거야
그때까지 잘 지내, 수정아
--- 「물고기의 전학」 중에서
자칭 세젤예 다솜이가 소개팅 어플 열심히 하더니
옆 학교 남자애들이랑 미팅 약속을 잡았다
토요일 낮 네 시 홍대입구
-걔네들 몬스타엑스라고 하니까
우리는 아이브 구성해서 나가자
멤버는 내가 선발한다
일단 난 안유진을 맡을게
다솜이의 선택을 받은
나, 도영이, 다경이, 규란이, 서정이
우리 여섯 명은 편집 숍 가서 옷도 사고
미용실 가서 머리도 다듬고 네일도 받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셔누와 아이엠을 기다리는데
저 멀리 보이는 여섯 개의 실루엣
온다, 온다, 온다!
몬스타엑스가 아니라 포켓몬스터잖아!
이상해씨, 리자몽, 고라파덕, 야도란, 꼬부기, 구구……
야, 낚였어! 튀어!
빛의 속도로 달린 우리는
다솜이를 벽에 몰아넣고 딱밤 한 대씩 먹였다
나, 너한테 낚였어!
다솜이는 몬스타엑스에게 낚이고
우리는 다솜이에게 낚인 날
--- 「나, 너한테 낚였어」 중에서
댄스 스튜디오는 내 피난처예요
학교, 학원, 과외, 숙제, 내신, 수시, 정시……
머리 아픈 것들로부터 달아날 수 있거든요
내가 춤출 때 세상엔 오직
거울 속의 행복한 나밖에 없어요
걱정하는 나도 없고 열등감 덩어리 나도 없어요
학교로 돌아오면 밀린 숙제들과 온갖 참고서
가정 통신문, 청소 당번, 아침 조회, 야자, 모의고사
삐친 친구 달래 주기, 빌린 돈 갚기, 줄인 교복 치마 다시 풀기
짜증나고 괴로운 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요
춤이라는 네버랜드에서 나오자마자 세상은 전쟁터네요
엄마는 내가 댄스 스튜디오에 다니는 줄 모르는데
설마 들키진 않겠죠- 들키면 집에서 쫓겨나요
카리나 언니처럼 유명한 가수가 돼도 용서 안 해 주실 거예요
우리 엄마는 래퍼거든요 엄마의 유일한 음악은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뿐이라서요
--- 「네버랜드」 중에서
고무줄놀이 인형놀이 숨바꼭질 얼음땡
공기놀이 소꿉장난 눈싸움 액체괴물 만들기
어릴 땐 그렇게 재밌더니 이젠 다 시시해
우리들은 이제 볼터치 하고 반스타킹 신고
커버댄스 추면서 어른 흉내 내고 노는데
어릴 적 소중하던 것들이
더 이상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어른이 되는 거래
--- 「어른이 된다는 것」 중에서
내 키만큼 찌를 맞추고 낚시를 던졌다
저 물에 빠지면 나도 머리끝까지 잠기겠지
그러면 나도 세상도 다 사라질 텐데
주머니 속 구겨진 만이천 원을 꺼내 낚시비 냈다
찌가 올라오는 줄도 모르고 허공만 보다가
붕어 몇 마리 놓치고 젠장 젠장 욕하면서
저녁에는 낚시꾼 아저씨들 틈에 끼여
스무 살이에요 거짓말하고 라면을 얻어먹었다
소년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데
만이천 원짜리 결석이 끝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
붉게 번져 가는 야광찌만 바라보았다
--- 「만이천 원짜리 결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