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인 우리는 마치 예수님의 말씀이 불완전한 것처럼, 말씀을 뒤섞거나, 얼버무리거나, 과장하거나 그 의미를 희석하곤 합니다. 이런 말까지 들은 적이 있어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려고 신학교에 갔는데, 그곳에서 배운 것은 예수님이 하신 그 말씀이 실제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 같은 순전함과 단순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이렇게 말했죠. “문제는 단순하다. 성경은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척한다.” 지금은 어린아이의 순수함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주석 없이도 성경을 읽고 “예수님이 정말로 이런 뜻으로 말씀하셨는가?”라고 물어야 해요.
저는 신학적인 논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단순하게 읽고 그분이 의도하신 대로 사는 데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성경을 읽고 어제보다 오늘 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들의 백합화와 새처럼 산다면, 저는 성경대로 살고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붉은 글씨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보니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것 같다며 우리를 ‘치우친 그리스도 신봉자’라고 비판하더군요. 물론 그보다 더 나쁜 말도 듣긴 했지만, 어쨌든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이 히브리어 성경의 하나님임을 믿으며, 모든 고대 신앙고백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분?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성자 하나님?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구약 성경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분명 성경에 있습니다. 자신의 둘째 아내의 시체를 토막 내어 열두 지파에게 보낸 레위인 이야기처럼 말이죠(삿 19장). 그러나 이 점이, 예수님이 놀라운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과 세상을 보게 하는 렌즈이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사사기 19장처럼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성경 말씀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선하고, 은혜로우시고, 가까이 계심을 깊이 확신하게 됩니다. (1장, 역사 중에서)
토니 나는 요즘 청년들이 우리 세대가 좀처럼 묻지 않았던 질문들을 던지는 게 크게 놀랍진 않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한 35년 전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을 때,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 청년이 산상수훈을 읽고 나서 나에게 보험과 퇴직연금을 갖고 있냐고 물어본 적이 있거든.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라고 했더니 그는 “방금 마태복음을 읽었는데, 미래의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이런 것들에 대해 염려하지 말랬어요”라고 말했지. 나는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나? 공중의 새와 들에 핀 꽃처럼 살라고?”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학생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서 참았어.
사실 난 그동안 모아 둔 연금, 사회보장금, 그리고 퇴직연금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 6:19)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제자라고 스스로 주장하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자문하고 있지. 난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했네. 나 자신을 위해 이 땅에 보물을 쌓았어.
자네 같은 청년들이 그런 일에 대해 도전적인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예수님의 말씀의 빛에 비친 내 생활 방식을 직면하게 돼. 예수님이 말씀하신 급진적인 생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별개로, 난 스스로에게 그런 생활 방식을 살아 낼 믿음이 있느냐고 묻는다네. 나는 이 질문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어.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붉은 글씨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지. 붉은 글씨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실제로 얼마나 붉은 글씨를 살아내고 있을까? 적어도 어제보다는 더 신실해졌다는 게 그나마 변명이 될까?
언젠가 어떤 학생이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교수님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알아요”라고 말하더군. 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그렇게 훌륭한데, 예수님과 함께한다면 얼마나 더 훌륭할까?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인 내 모습이 이렇게 형편없는데, 내게 예수님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대답했지.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니라, 지금까지 얼마나 나아졌는지,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를 보고 판단했으면 좋겠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