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부상담가다. 부부치료자라 불리기도 한다. 부부를 만나 그들이 가슴으로 토해내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많은 부부들이 사소하다며 애써 치부해버리는 이야기도 있고 커다랗게 한 방 날리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후 함께 대화를 나눈다. 치료적 대화. 그들이 감정적으로 활활 불타고 있다면 그 불도 진화한다. 활화산이 터진 상태라면 상대 배우자에게 일단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잠시 물러나는 게 지혜로울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한다. 활화산은 일단 내가 맡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화상을 입으니까. 두 사람 사이에 냉담한 빙산이 끼어 있다면 그걸 녹이기 위해 북극탐험가마냥 이것저것 조심스럽게 탐험하고, 필요하다면 쇄빙선에 올라타는 것도 익숙한 일상이다. 안심도 시키고 설명도 해주며 때론 확인도 시켜준다. 질문도 던진다. 과거를 재정리하고 현재를 붙잡으며 필요하다면 미래를 담대히 예측해본다. 당장 두렵고 괴로워 갈등상황이나 문제의 핵심을 부인하거나 회피하려는 부부, 진실 앞에서 강하게 막판 저항을 하는 부부, 그들의 마음을 담아주고 강하게 견뎌준다. 쉽지 않은 과정, 버티고 살아남아야 한다. 나 그리고 부부 모두.
그렇게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쌓여간다. 상담의 치열함, 사무치는 회한, 고통 속 깨달음, 쏟아지는 슬픔과 치유적 눈물, 단절의 복구, 밀려드는 감동도 켜켜이 쌓여간다. 그렇게 쌓인 성장의 부름켜 속에서 관계세포들은 왕성하고 아름답게 분열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부부들은 떠나고 나는 혼자 남는다. 때로 외롭다 느껴진다. 그들과 정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그렇다. 정이 들어버린다. 하지만 난 내색하지 않는다.
---그가 당신을 두려워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접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신체적 접촉, 심리적 접촉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물리적 실감, 마음에 떠오르는 내적 이미지 모두 말이다.
존재와 존재의 접촉은 위안을 준다. 부부간에도 부모자녀 간에도 친구 간에도 상담자와 내담자 간에도 서로 접촉하고 있는지, 접촉할 수 있는지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그저 함께 앉아 마주보고 대화한다고 해서 접촉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내가 너를, 네가 나를 정말로 어루만지고 보듬고 헤아릴 수 있는지, 마음과 마음이 잘 연결돼 있는지, 내 속마음을 상대방에게 안심하고 보여줄 수 있는지, 그리고 상대가 그 마음을 품어주는지. 그런 실질적이고 온정적인 만남과 어루만짐이 진정한 접촉일 것이다. 단순한 애정의 문제 그 이상의 의미 말이다. 서로 깊이 눈 맞추는 것, 안부문자를 주고받으며 미소 짓는 것,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대화가 깊어지는 것, 손을 맞잡는 것, 서로 따스히 끌어안는 것 그리고 뜨겁게 화해하는 것, 이 모두는 접촉을 향한 우리의 몸짓이다. ‘접촉위안’은 우리 삶의 ‘관계산소’다.
서로의 마음을 할퀴는 잦은 싸움, 격심한 싸움, 냉전,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시도, 비난과 무관심… 이 모두는 ‘접촉’이 끊어지고 붕괴되는 결과를 낳는다. 안정감도 무너진다. 안정감이 무너진 자리에는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두려움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이제는 그저 두려울 뿐이다. 그 사람 앞에서 설레며 두근거리던 내 마음이 이제는 긴장과 경계심으로 쿵쾅거린다. 사랑을 주고받던 우리가 공격과 싸움, 분노와 비난을 주고받는다. 내게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는 상대가 너무 무섭다.
두려움을 거둬내고 붕괴된 접촉을 살리는 길, 위축된 마음을 펴고 무너진 안정감을 되찾는 길. 우리가 가야 할 길이지 않을까. 그 길 위에서 뜨겁게 서로를 안아주는 포옹. 마음에 평안을, 관계에 안락함을 안겨주는 재생의 여정을 시작하는 용기. 나와 부부들은 걸어가고 또 걸어간다. 삶은 그렇게 두려움을 거둬내는 과정 아닐까. 용기, 내볼 일이다.
---그가 당신을 두려워한다
울어본 적 없는 사람은 불행하다. 우는 사람이 불행한 게 아니라 울어본 적 없는 사람이 불행한 것이다. 슬퍼할 수 있다는 건 마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마음이 살아 있다는 건 상황에 맞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슬플 때 슬퍼할 수 있고, 화날 때 화났다는 걸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이 기쁠 때 충분히 기뻐할 수 있고 행복도 느낄 수 있다. 슬픔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원동력인 건강한 죄책감과도 연관되고 상대방에 대한 공감, 연민과도 맞닿아 있다. 슬픔을 느끼고 눈물 흘릴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정화장치가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그는 울지 못한다. 깊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우울함과 슬픔의 기미가 저 멀리서 다가오면 바로 술을 마셔버린다. 마음을 마비시킨다. 그러면 흥이 나고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눈물과 슬픔을 외면하고 살아온 세월 속에서 그는 점점 로봇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원했다. 따뜻한 관계를 원했다. 슬플 때 울고 기쁠 때 웃고 마음을 표현하며 정서적인 대화를 나누는 관계. 서로의 아픔을 들여다보며 부둥켜안을 수 있는 관계 말이다. 긴 세월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달래봤지만 그에게 남은 건 공허함과 허무함, 외로움뿐이었다. 술을 마시며 낯선 여자와 대화를 나누어도, 혹여 그 여자와 가까워졌다 느껴져도 정서적 불구는 치유되지 않았다. 그에게 술은 그저 자기 몸을 지탱해 앞으로 걷게 하는 목발일 뿐이었다.
---그가 술 마시는 이유는 따로 있다
“제가 우울증인 것 같아서 치료를 받아볼까 생각도 해봤어요. 이 생각은 몇 달 된 것 같아요. 싸우면 너무 힘들어서 한 달 전부터 아내에게 부부상담 받자는 제안도 했죠. 살기 싫다,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그냥 키우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아내는 저의 제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라고요. 아내는 힘들지 않나? 나만 괴로운가 하는 생각에 씁쓸했어요… 그래서 좀 늦게, 이제야 오게 된 겁니다.”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아픈 일이다. 관계의 초기에는 상처 준 자, 상처받은 자를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이내 무의미해진다. 두 사람 관계란 거울과도 같아서 일방적인 상처란 있을 수 없는 데다, 상처받은 사람은 그 아픔을 그대로 가지고 상대를 대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비슷한 고통을 되돌려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상처를 받으면 재차 상대방이 ‘그 느낌’을 고스란히 느끼도록 만든다. 그래서 상처를 많이 입은 자가 나중에 보면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이 되어 있는 걸 보곤 한다. 즉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은 이미 상처를 많이 입은 사람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물론 타인에게 무조건 상처를 주는 성격적 문제를 지닌 사람은 예외다.)
---남자의 상처는 오래간다
나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거리’라 생각한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상대와 잠시 멀어지는 것. 나에게도 너에게도 공간을 주는 것. 그렇게 거리를 조절하는 것이 사랑이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며 유연하게 조율하는 심리적 능력이야말로 관계의 질을 한껏 높여주는 고급스런 마음가짐이다. 특히 장기적인 관계, 애착관계에서 더 그렇다. 그래서 난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거리조절, 거리두기의 심리처방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거리 두기는 서로의 감정을 식히고 지혜로이 다룰 수 있는 강력한 대처방법이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관계를 완전히 끊는 게 아니라 일단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가 이런저런 상처로 얼룩져 툭 끊어지기 전에 거리 두는 행동을 성숙하게 함으로써,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관계가 파국으로 흘러가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마음도 가라앉히고 관계에도 기회를 주는 것이다. 상대방과 이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끌고 나갈지, 내가 이 관계에서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이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인지는 일단 거리를 두고 떨어져 나와 마음을 추스른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갈등과 서로의 상한 마음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체 그림을 관망하는 것, 거리 두기는 관계의 심호흡이자 산소호흡기다.
---남자의 상처는 오래간다
“저는 말입니다, 선생님. 싸울 때 싸우더라도 서로 부딪치고 배출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게 차라리 좋은데… 아내는 제가 뭐라고 조금만 하면 상처받는다고 하니 아예 얘기를 하지 않고 속에 담아놓게 되더군요. 아예 싸움을 만들지 말자… 아… 답답합니다. 지내다 보면 마찰이 일어날 수도 있고 소리가 높아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가능한 한 부드럽게 말해야겠지만… 아내가 너무 엄격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아내와 싸우지 않으려고 자꾸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고… 아내에게 제가 거짓말하는 걸 지인들이 보는 것도 싫습니다. 그들이 아내를 나쁘게 볼 것 아닙니까. 그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정우 씨는 여전히 괴로워 보였다. 아내가 정우 씨를 단단히 벌한 듯했다. 대놓고 혼내는 것만이 벌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어떤 행동을 못하게 하는 것도 벌이다. 상대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거나 내게 상처를 입혔을 때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겁을 주는 것, 상대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거나 더 크게 화를 내는 것, 상대 앞에서 되레 나를 자학하는 것도 모두 간접적인 처벌행동이다. 상대방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정우 씨는 행동의 자유가 제약당한다고 느끼는 듯했고, 아내가 격한 감정반응을 보일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것 같았다.
---차마 화낼 수 없어서 거짓말한다
“선생님, 진짜 좀 쉬고 싶습니다. 가사분담에 대한 아내의 집착이 지나쳐요. 아내는 제가 집안일을 다 해주길 바라나 봐요.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리다 집에 오면 아내가 밀린 집안일을 시킵니다. 제가 바깥에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는 관심 없어 보여요. 제가 아직 젊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직장생활하면서 참아야 할 게 너무 많습니다. 온갖 스트레스와 화, 짜증을 다 참습니다. 얼마 전에는 제가 아내에게 소리 질렀습니다. ‘밖에서 이렇게까지 내가 수모를 당하는데 집에서 너까지 이렇게 힘들게 하냐! 나 좀 쉬면 안 되는 거니!’ 그랬더니 아내가 같이 소리를 지르더군요. ‘나는 안 힘든 줄 알아?’꼭 자기가 더 힘들다고 난리입니다. 제 마음을 속 시원히 말할 곳이 없습니다….”
고통 배틀(battle)이 일어나고 있구나. 남자와 여자, 친밀한 두 사람이 깊은 관계로 진화하기 위해 이루어가야 할 관계 레퍼토리 중 매우 중요한 하나가 바로 고통분담과 고통공유가 원활히 이루어지는 ‘심리적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잘 구축되지 않으면 역기능적 시스템이 대신 자리하게 된다. 갈등상황에서 누가 더 힘든지 다투고 너보다 내가 더 힘들다고 주장하는 고통 배틀 시스템이 그것이다. ‘내가 더 힘들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계속 강한 카드를 내밀며 힘겨운 심리게임을 한다. 이런 커플을 나는 참으로 많이 만났다. 정작 그들은 고통 견주기 게임을 하고 있는 줄 전혀 모른다. 나를 통해 게임의 실체를 알게 되면 그들은 한결같이 매우 놀란다. 그리고 크게 이완된다. 이때 매우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남을 수없이 목격했다. 터닝포인트다.
---그는 단지 피곤할 뿐이다
“아내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차이가 납니다.”
“음… 맞지 않는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요?”
“아내는 자로 잰 듯 선을 딱 긋습니다. 그 선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아내가 정한 틀을 지켜야 하고 아내가 원하는 행동을 해야 하고. 집안에서도 해야 하는 행동,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 딱 정해져 있어요… 더불어 가면 안 되는 곳, 만나면 안 되는 친구….”석재 씨는 주변 어디에 금이 혹시 그어져 있나 찾아보는 듯 긴장된 눈빛으로 자신의 허리쪽 허공을 둥글게 하지만 꼼꼼히 살핀다. 선이 있다면 넘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부부 사이에서 토로되는 ‘우린 맞지 않아요, 성격차이예요’라는 표현은 알고 보면‘내가 관계 안에서 좌절했다, 네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의미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어렵다든지 내가 다가갔는데 상대방이 밀어냈다든지, 내 제안을 배우자가 거절했다든지, 배우자에게 화가 많이 났을 때, 그런 일이 켜켜이 쌓여 잔뜩 누적되었을 때 우리는‘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방어적 표현을 끌어다 쓴다. ‘내가 너를 원한다, 내가 너와의 화합을 원한다, 네가 나를 밀어내 슬프다’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한다. 석재 씨의 말 이면에도 결국 아내에게 다가가려다 거절당한 경험, 아내의 지적과 평가에 상처받은 마음이 이리저리 얼버무려져 있었다. 정체불명의 비빔밥처럼 어지러웠다.
---인정받는 남자는 떠나지 않는다
딸아이가 친구 만나러 나간 어느 일요일 오후에 팥빙수를 먹으며 나와 남편은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마음속 고민까지 대화의 흐름은 유연하고 편안했다.
“오빠, 얼마 전에 내가 사진 정리를 했어… 정말 옛날 일들이 다 기억나더라. 그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사진들이 몇 개 있는데 어떤 건지 알아?” “어떤 사진인데?” “하나는 연지가 돌 전인데 내가 넓은 마당에 서서 연지를 가슴에 안고 활짝 웃고 있는 걸 오빠가 찍어준 거야. 그 시절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인 것 같아. 내 인생의 사진을 한 장 고르라 하면 난 그 사진이 떠올라… 연지를 낳고 그 해, 그때의 ‘행복의 기억’이 아주 아름답게 남아 있어….” 결국 가장 깊은 행복감은 관계기억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그러면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지금 오빠랑 나랑 맛있게 팥빙수를 나눠 먹으며 대화하는 이 장면도 20년 후 즈음에 ‘행복의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 오빠랑 나랑 할아버지, 할머니 되고 그때 오늘을 돌아보면 말야… 그치?”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가 우리 둘을 감싸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그렇게 대낮에 수많은 타인들과 뒤섞여 팥빙수를 앞에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역사를 공유했다. 이 순간이 ‘행복의 기억’으로 새겨질 거라 느껴지는 순간 내 눈에 뭔지 모를 눈물이 차올랐다. 팥빙수를 먹다 말고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런 나를 쳐다보다 덩달아 눈이 빨개진 남편은 아쉬운 대로 팥빙수집 냅킨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촘촘한 줄무늬 엠보싱으로 사방이 주욱 둘려진 정사각형 한가운데에 ‘감사합니다’라는 밤색 글씨가 다소곳이 찍힌 누런 빛 냅킨은 그 어떤 실크보다 부드러웠다.
---남자를 안아주어라, 행복하게 사랑하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