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 형식을 빌려서 국내 저자가 집필된 책은 읽어보질 못한 것 같습니다. 좀더 편하게 말해주신다면?
에셔·마그리트·피라네시, 대화(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서술이라는 세 가지가 각자 따로 가면서 특정 지점에서는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죠. 서로 이해를 도와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미학’이라는 주제를 세 개로 나누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기본적인 서술, 이건 문어체이구요.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에서는 ‘대화’를 등장시켰는데요. 저는 대화를 통해서 독자가 궁금해 하는 부분을 주요 포인트로 삼았습니다.
▶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내용’이라고 했는데요. 10년 전 이 책을 처음 집필할 때에는 무엇을 근거로 잡은 겁니까? 선생님이 직접 주변에 모니터를 한 것인가요?
아니요. 그건요. 내가 공부할 때 처음에는 몰랐다가, 시간이 지난 뒤 ‘아하!’하고 이해했던 내용들이 있었어요. 그런 내용들을 ‘대화’ 형식 속에 넣은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드러냈습니다.
▶ 쉽게 이해시키려 한 게 아니라, 공부하면서 스스로 체득한 앎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거였군요. 다시 말하면 친구들과의 우정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본문 속에 있는 에셔와 마그리트, 그리고 이번에 새로 소개한 피라네시의 그림들은 어떤 의도로 배치되었는지 이해가 되는 듯한데요. 그러면 에셔와 마그리트, 피라네시 그림들의 배치도 형식 미학 이론이 있는 건가요?
에셔와 마그리트, 피라네시 그림은 ‘기술적 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셈인데요.
▶ ‘기술적 형상’이라……?
세계에 대한 기술(그림)이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그림으로, 일종의 상징이나 알레고리처럼 사용한 것이죠. 에셔, 마그리트, 피라네시라는 독특한 화가를 소개하는 것보다는 그것이 본문에서 서술되는 내용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니까요.
▶ 지금까지도 읽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데, 저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어떤 요소들이 주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마도 오랜 시간 독자와 할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와 구성에 있죠. 글쓰기는 우연히 인터넷 시대와 딱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저의 서술 자체가 문어와 구어의 중간 단계였던 것 같고, 아울러서 책 전체가 모자이크적인 구조잖아요. 선형적인(시간의 흐름) 텍스트에다가 공간적인 그림을 배치하고, 텍스트 자체도 상당히 시각적으로 서술했거든요. 텍스트를 봐도 형상이 잡히게끔 말이죠.
▶ 선생님은 미학 오디세이를 시작으로 해서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독자와의 소통이 이루어졌잖아요. 기억에 남을 만한 일도 꽤 있을 듯한데, 이 책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황지우 선생이 어떤 말을 했다는데 제가 듣질 못했고. 그렇지! 무용에 사용되었다고 한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NOW무용단’이라는 현대무용을 하는 모임이 있는데요. 대본을 쓰고 안무한 손인영 씨라는 분이 《미학 오디세이》를 읽으면서 인터넷이란 코드 안에서 천 년 전의 처용을 부활시키고 싶었다고 했죠. 신라시대 처용 설화와 궁중정재인 처용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한국창작무용 ‘아바타 처용’이라는 작품이었는데, 가상과 현실 세계를 융합, 신화 속의 잡귀들과 처용을 디지털 문화의 산물인 아바타와 연결시켰다고…….
▶ 그간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요. 스스로 미학적 삶을 기획하고 있는지요?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요?
저의 미래요.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계속 공부하는 것이고, 전업적인 작가로 나서서 저술하고 싶고, 또 생활의 여유가 더 생긴다면 인문교양서만이 아니라 본격적인 미학연구서를 쓰고 싶습니다. 대중들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나만의 놀이도 하고 싶고 등등. 나의 생각들을 계속 밀고나가 사고의 극한까지 가보고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이건 독자들이나 제가 궁금해하는 것인데요. 작가나 저자들은 글을 쓰고 난 뒤, 마지막 탈고 과정을 거치잖아요. 바로 그때 선생님이 최종적으로 하는 마지막 과정은 무엇인가요?
저는 글을 쓸 때 ‘낭독’을 하구요. 마지막으로 정리해 놓고 또 ‘낭독’합니다. 그때 글이 ‘씹히는 곳’을 발견하죠. 소리 내어 읽어나가면 글의 리듬을 느낄 수 있거든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제 글이 시적인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P.S.
진중권 선생은 자신의 글쓰기와 이진경 선생의 글쓰기를 가끔 비교한다. 이진경 선생의 글쓰기가 산문적 글쓰기라면, 자신의 글쓰기는 시적인 글쓰기라고 말이다.
― 지난 2004년 3월 5일 휴머니스트에서 미학 오디세이 3권의 마지막 원고 검토를 진중권 선생과 함께 진행하였습니다. 이 인터뷰 내용은 그때 잠시 시간을 할애하여 진중권 선생과 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강의와 집필, 그리고 각종 글쓰기로 바쁜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지난 2003년 11월에 진행된 인터뷰 내용도 부분적으로 삽입되었음을 밝힙니다.(편집자주)
▶ 10년 만에 “미학 오디세이가 완간되는 순간”입니다. 느낌이 매우 다를 것 같습니다. 혹, 벅차다거나 감격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은지요?
글쎄요. 뭐 오랫동안 미루어왔던 일을 ‘싹’ 정리하는 기분이죠. 10년 전, 그때 저는 베를린으로 유학 간 가난한 유학생이었죠. 지금은 결혼도 하고, 아빠가 되었으니……. 이 책이 살아 움직이게 한 독자분들께 감사드리고 싶네요.
▶ 이 책은 지금 읽어도 무척 재밌습니다. 이 글을 쓴 지가 10년 전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인데요. 90년대 초반 이 책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터인데요. 도대체 이 텍스트에는 어떤 비밀이 담겨 있는 겁니까? 그리고 이번에 출간된 “미학 오디세이 3권”은 1, 2권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당시는 사회과학이 밖으로 나온 때였죠. 지금 이야기하는 ‘대중서’들이 처음 선보이기 시작한 시기였을 겁니다. 구상은 92년 정도 시작했죠. 늘 아쉬운 게 하나 있었어요. 이 책이 쉽게 씌어졌다고 해서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몇 가지 밝혀야 할 것 같아요. 이 책의 내용은 절대로 쉬운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겁니다.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이 글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연구되고 있지 않은 미학 이론들을 담아야 했기에 공부를 꽤 많이 해야 했어요. 많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죠. 왜냐면 기존 학계에서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저 혼자 공부를 해서 얻은 내용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을 재구성하고 되새김질 했던 것이죠. 그런데 3권은 좀 달랐습니다. 그간 공부해온 것도 있고, 또 유럽에서 벤야민이나 비트겐슈타인 등을 공부하면서 얻은 경험도 있었구요. 3권의 가장 큰 변화는 미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1~2권에서는 주로 근대미학의 틀 위에서 작업을 하며 근대와 탈근대를 가르는 경계선까지만 나아갔지만, 3권에서는 그 선을 넘어 본격적으로 ‘탈근대’의 관점에서 최근의 미학을 다루고 있죠. 아마 3권을 읽어 보면 이 정신적 분위기의 차이가 느껴질 겁니다.
▶ 3권의 경우는 결코 쉽지 않은 내용들이었습니다. 쉽게 읽히려 했다면 나름의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요?
패러다임을 제대로 설정했던 게 전체 내용을 쉽게 이끄는 주요한 요인이었을 겁니다. 가상과 현실의 관계라는 패러다임을 설정한 것이 맞아떨어졌죠. 3권은 원본과 복제, 그리고 복제의 복제인 시뮬라크르 등을 설정해 현대 미학의 세계를 살폈고 끝에서는 ‘다시 가상과 현실’이라는 문제 의식을 던지면서 마무리했습니다.
▶ 피라네시라는 예술가가 등장하는데요. 바로크 시대 인물이 탈근대 미학을 다루는 “미학 오디세이 3권”의 키워드로 등장합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바로크와 낭만주의는 고전주의 미학과 대립 속에서 자라난 대표적인 사조예요. 현대예술이 고전주의 예술이상이 무너진 자리에서 자라났기에, 바로크와 낭만주의는 어떤 면에서 현대예술의 선구라 할 수 있습니다. 피라네시는 바로크 시대에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선취한 작가이기에, 바로크-낭만주의-현대예술로 이어지는 라인이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것이죠.
▶ 보르헤스의 사유가 곳곳에 등장합니다. ‘지은이의 말’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주로 어떤 실마리를 제공했는지요?
보르헤스는 말 못하는 피라네시의 그림을 대신하여 발언하도록 구성했습니다. 보르헤스의 텍스트는 각 장의 내용을 형상적으로 요약하는 ‘미적 엠블렘’입니다. 나는 보르헤스가 피라네시의 작품을 보았거나 최소한 다른 저자들의 글을 통해 그를 잘 안다고 확신합니다. 보르헤스의 환상적 리얼리즘은 피라네시의 감옥의 상상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죠. 작가나 사상가는 정작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의 이름은 종종 생략하는 버릇이 있는 것 아시죠.
▶ 보르헤스의 《픽션들》, 《알렙》은 엄청난 상상력이 담긴 책들이죠. 1, 2권의 독자들이 《미학 오디세이 3》을 보면 보르헤스의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예! 가능합니다. 아울러 저는 이 책의 서술 과정에서 보르헤스 텍스트의 바탕에 깔린 철학적 배경을 드러내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이 작가에 대한 좀더 깊은 독해를 제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를 흔히 ‘탈근대의 선구’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 그 말의 의미를 여실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작업을 하는 가운데, 탈근대 미학의 다양한 논점을 다루는 이 책의 거의 모든 부분에 그의 텍스트를 인용할 수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죠.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물먹이’는 디오게네스가 등장하는데요. 그가 등장하는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요. “미학 오디세이 1, 2, 3”의 전체 틀에서 세 사람의 역할을 조망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미학 오디세이 1권과 2권은 전체적으로 합리주의 철학의 틀 위에서 작업했어요. 때문에 합리주의 전통에 우뚝 서 있는 두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으로 미학사를 요약해야 했구요. 하지만 3권은 경우는 탈근대의 관점이라는 바탕이 있기에, 합리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을 위해 ‘디오게’(네스)가 등장한 것이죠. 오랫동안 합리주의적으로 서술되어온 철학사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디오게네스를 화자로 캐스팅했습니다.
▶ 근대의 관점에서 본 철학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기둥 위에 세워져 있지만, 탈근대의 관점에서 본 철학의 역사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과 니체의 대립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디오게네스는 2,300년 먼저 태어난 ‘그리스의 니체’라고 할 수 있어요. 때문에 대화편에서는 디오게네스의 형상에 슬쩍 니체를 얹어놓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논쟁을 벌이게 만들었습니다.
▶ 이 시리즈는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꽤 의미를 부여한 것 같습니다.
형식면에서는 3성대위법을 썼습니다. 3개의 구조가 시간적으로 진행되면서 공간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