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루모카’라는 필명으로 조아라에서 활동 중입니다. 처녀작이 종이책으로 나오다니 기쁘고 설레면서 걱정도 됩니다. 2년 전의 제가 책을 낸다는 생각으로, 그때의 느낌은 유지하되 많이 보강하고 고쳤습니다. 마지막장을 넘길 때까지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doutormocha
소녀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후드 모자를 젖혔다. 동시에 백금색 머리카락이 화사하게 흩날리며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그녀의 이름은 레아 쥬르넬 반 하리엔느. 황제인 아버지의 생일선물을 직접 마련하기 위해 잠시 황성에서 빠져나온 황녀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손수 케이크라도 만들어서 귀환하려 했는데 무슨 죄인 잡는 것마냥 병사들이 쫓아올 건 뭐람. 레아는 기지개를 펴며 들판을 쭉 둘러보았다. 넓은 강을 따라 움직이던 눈에 뭔가가 포착되었다. 시야를 아름답게 물들이는 은청색 머리카락…… 엥, 아까 그 사람이잖아. 레아는 조금 당황하여 눈을 의심했다.
“당신…… 어떻게 여기 있어요? 뒤따라온 거예요? 이상하다. 내가 먼저 출발했는데……?”
“…….”
“아하, 보기보다 걸음 무진장 빠른가 보네요. 나도 그리 느린 편은 아닌데. 설마 다리…… 다리 길이 차인가?”
레아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자기도 그다지 짧은 다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투덜거리는 그녀 앞에 아까 입을 틀어막았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반갑습니다.”
“……?”
“인사, 모르십니까?”
“알죠! 당연히 알죠!”
눈을 깜박거리던 레아가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마구 흔들어대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스치듯 지나가는 미소가 정말이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레아를 유심히 살피는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퉁. 누군가 심장에 돌을 던지는 듯, 레아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름이 뭐예요?”
“세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세이……요?”
“예,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세이, 세이, 세이……. 평민인가? 평민으론 도무지 안 보이는데……. 몇 번인가 입 안으로 그 이름을 굴려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갑자기 강한 힘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녀는 이미 정체 모를 은청발 남자에게 안겨 있었다. 남자는 그대로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갔다. 곧 공기 속에 녹아들 듯 고요한 목소리가 번졌다.
“당신은 제가 당신을 잊은 줄로만 알겠지만…….”
“…….”
“저는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오랫동안……. 돌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레아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 뭐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데 날 어떻게 알고 기다려? 미친 건 아닌 것 같은데. 아마도 사람 잘못 본 모양이다. 얼른 그렇게 말해줘야지.
레아는 차분하게 세이의 어깨를 짚고 밀어냈다. 세이는 신사답게 그녀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레아는 당돌하게 눈을 빛내며 생각한대로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세이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낯선 이방인 같았다. 그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입매에 맺히는 부드러운 미소가, 그리고 가늘어지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좋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방금까지 하려던 말은 어느새 세이의 미소에 떠밀려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지금은 그저…….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아팠다. 왜 이렇게 심장이 지끈거리는 걸까, 저렇게 행복하고 진심 어린 미소를 보면서 왜…….
“우리, 만난 적이 있어요?”
레아는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세이에게선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저 더없이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