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 작품 소개]
「버니」
작가의 등단작. 화자의 서술이 랩과 비트박스로 진행된다.
고등학교 중퇴자인 ‘나’는 보도방을 운영하며 매춘 알선업자로 일한다. 하루는 친구의 동생 순희가 찾아온다. 어딘지 몸이 불편한 그녀는 오로지 랩과 노래로만 자신의 의사를 밝힐 수 있는데,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업계에서 순희의 명성은 높아가고 결국 <영계 보도방> 대표 선수가 된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밤 호텔에 들어갔다가 사라진다. 6개월 뒤 순희는 신세대 여성 랩퍼 ‘버니’가 되어 TV 속에 등장한다.
“내 별명은 바구니 물을 담으면 물이 새고 쌀을 담으면 쌀이 새는
대나무로 만든 가벼운 바구니 내 머리가 가벼워 내 별명은 바구니
태어날 때부터 가볍게 죽을 것 같았던 내 별명은 대바구니
아무것도 몰라 아빠도 몰라 엄마도 몰라 사는 것도 몰라 세상을 몰라
아무도 나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하지만 난 이렇게 말하지
나도 가볍고 너희들도 가벼워 내 말도 가볍고 너희 말도 가벼워
나도 바구니 너희도 바구니 물을 담으면 물이 새고 쌀을 담으면 쌀이 새는
세상은 바구니” (8~9쪽)
「햄릿 포에버」
학창 시절, 본드 흡입으로 교도소를 드나들었던 이시봉은 차서화의 극단에서 대사 없는 단역 및 음향기사 보조 등으로 4년 동안 일해오고 있다. 극단주 겸 연출자인 차서화는 극단의 존폐를 결정지을 「햄릿 2004」를 무대에 올리기로 한다. 그녀가 각색한 형편없는 대본으로 연습이 진행되던 도중 이시봉은 본드를 불고 있는 진짜 ‘햄릿’을 목격한다. 그의 눈에만 비치는 햄릿은 극 여기저기를 문제로 지적하며 이시봉과 비밀스런 교류를 한다. 이를 눈치챈 차서화는 함구하는 대가로 햄릿의 충고를 쪽지에 적어줄 것을 이시봉에게 요구하고 그는 햄릿의 아버지, 망령의 배역을 따낸다. 계속되는 밀약 속에 차서화를 경멸하던 햄릿은 말없이 사라져버리고, 대신 나타난, 1991년에 행방불명된 그의 아버지를 목격한 이시봉은 기절하고 만다. 그리고 차서화와의 다툼 끝에 그녀를 본드로 질식케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 모든 것이 다 꿈이거니, 다 환각이려니 생각했습니다. 때론 현실보다 더 생생한 환각도 있으니까요……. 한편으론 다행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제 주의의 모든 것이, 심지어 제 자신조차도 가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아무 변화가 없는데 나만 혼자 미쳐 날뛰고 있는 듯한 두려움, 혹은 외로움 같은 거 말입니다. (73쪽)
「옆에서 본 저 고백은 ─ 告白時代」
재덕과 시봉은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현재는 앵벌이로 지하철을 전전하고 있다. 사정이 전과 같지 않아 선배가 운영하는 회사에 입사하려는 그들에게 놓인 과제는 자기 소개서! 문서 작성이라곤 경찰서에서 조서 쓰는 일밖에 경험이 없는 그들은 동네 PC방 아르바이트생 ‘팔대이’를 끌어들인다. 그런데, 뿔테 안경 속 어리숙한 인상의 팔대이는 자꾸만 시봉에게 진심어린 ‘고백’을 강요한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불행이란 뻔하지 않은가. 이제 뻔한 불행은,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 허더라도 더 이상 불행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미처 자신들이 생각해내지 못한 불행, 좀더 불행한 불행에 약해지는 법이다. (90쪽)
이건 뭔가 이상하다. 자꾸만 상황이 역전되는 것만 같다. 왜 우리가 팔대이한테, 저 비루하고 힘없고, 개 같은 인생을 산 놈에게 주눅이 들어야 한단 말인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느냐 말이다. (96쪽)
「머리칼 傳言」
용인 굴암산 기슭의 용수사 주지 ‘지종’은 병든 아내와 자신의 노후를 위해 다섯 살배기 여자아이를 고아원에서 데려온다. 평소 굵고 풍성한 여자아이의 머리채가 ‘불온하고 불안한 그 무엇’으로 여겨지는 지종은 머리칼을 자르려고 한다. 그러나 머리칼은 여자아이의 신체의 일부가 아닌, 전혀 다른 생명체인 양 기묘한 힘을 발휘하여 그런 지종을 물리친다. 15년 후, 여자의 머리채엔 무거운 무쇠 머리핀이 감겨 있다. 우연히 암자에 들른 고등학교 교사인 ‘남자’는 그녀의 머리핀을 풀고 산 아래로 데리고 간다. 그후 평범했던 남자의 일상은 순식간에 변화한다.
“하지만 네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그건 알지만…… 내가 모르는 내 마음이라는 것도 있잖아…… 그게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 속에 숨어 있을 수도 있고…….”(126쪽)
「백미러 사나이 ─ 사물이 눈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어린 시절 아버지가 던진 사기 재떨이에 머리에 커다란 상처를 갖게 된 청년 이시봉. 그는 우연히도 두 눈을 감으면 뒤통수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는 신기한 재주를 지니게 된다. 청년은 그것을 부활한 박 대통령의 두 눈이라 믿는다. 그 덕에 대학에 무임승차했고, 엉겁결에 ‘백만 학도의 선봉일꾼’이 되어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부활한 박 대통령의 눈도 그녀를 향하기는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 덕분에 손쉽게 대학에 들어갔고, 백만 학도의 선봉일꾼이 되었으며,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청년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자 자신의 뒤통수에 생긴 박 대통령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청년은 의도적으로 박 대통령과 멀어지려 노력했다. 사랑을 새마을 운동처럼 할 순 없는 거라고, 새마을 운동이 오히려 사랑을 방해할 수도 있는 거라며……. (185쪽)
「간첩이 다녀가셨다」
부모가 물려준 주유소를 꾸려나가는 규칠, 중학교 수학 교사인 남석, 그리고 서울서 대학원을 다니는 수영은 모두 봉평 선후배 사이다. 간첩 출몰과 함께 예비군 훈련에 소집된 이들 조에 타지인 ‘김’이 합류한다. 서울서 땅장사를 한다며 은근히 봉평의 계발계획 붐을 흘리는 ‘김’은 술과 안주거리를 내놓으며 이들의 환심을 사기에 바쁘다. 다음 날 새벽, 눈을 뜬 셋 앞에 ‘김’은 싸늘한 시신으로 놓여 있다.
수영의 말을 들은 규칠과 남석은 마치 화두를 건네받은 수도승들처럼 생각에 골몰했다. 그러곤 무언가를 깨우쳤다는 듯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 곁에서 수영은 계속 간첩 새끼, 간첩 같은 새끼, 라고 웅얼거리며 누워 있는 김을 바라보았다. (228쪽)
「최순덕 성령충만기」
믿음이 신실한 부모의 영향으로 철들기 전부터 교회에서 자란 순덕의 유일한 관심은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실천이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만 머물던 그녀에게 교회 전도사가 다가와 이른다. 밖으로 나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의미를 깨우치라고. 그러나 순덕의 사회생활은 원만하지 못하다. 어느 날 골목길에서 ‘아담’을 맞닥뜨린 그녀는 그를 전도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한다.
순덕은 확신을 갖고 다시 사흘 밤낮으로 기도하니 그 기도의 말인즉슨
아담으로 하여금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아담이 되게 하소서
뱀의 유혹에 빠지게 하소서이더라 (258쪽)
「발밑으로 사라진 사람들」
생의 목적이 자신의 감자밭 일구기인 황순녀(黃順女)는 모든 이가 피난을 떠난 전쟁 통에 검은 소에게 일을 당하고 아들 우석(牛石)을 낳는다. 큰아버지가 주고 간 암소 누렁이와 함께 감자밭을 일구던 그녀의 집 너머에 군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국유지에서 민간인을 내쫓으려는 군인들과 무슨 일이 있어도 감자 파종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순녀는 팽팽히 대립한다. 그러던 어느 해 노쇠한 누렁이가 수명을 다하자 아들 우석이가 직접 쟁기를 메고 밭을 갈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군인들과 동네 사람, 그리고 신문 기자들까지 그들 모자 곁으로 몰려든다.
지금이라도 당장 뛰쳐나가 눈앞에 보이는 아무 땅이나 파보아라. 지상에서부터 약 십오 센티미터 정도만 파고들어가면, 그곳에 당신이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당신이 상상치도 못했던, 씨감자가 싹을 틔우고 있을 테니……. 주변이 온통 시멘트 천지라고? 철물점에 가서 시멘트 깨부수는 망치를 사라, 이 친구야. 시멘트 밑에 뭐가 있겠는가? 제발 상상 좀 하고 살아라. (3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