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를 키우며 먹을거리와 끼니를 쉴 새 없이 고민했고, 입이 짧아 어려서부터 남달리 몸이 약했던 둘째 딸 입에 맞는 떡을 만들면서 인생의 반전이 시작되었어요. 열여섯 번의 전국 요리대회에 출전하여 수상하였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전통 떡 전문가로 부름을 받아 종종 방송을 타기도 했습니다. 멀리 외국에 계신 분들까지 전통음식을 배우고 싶다고 물어오셨습니다. 모자라는 솜씨지만 정성껏 답을 드리려 노력하면서, 자연스레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요. 하루 다섯 시간씩만 자면서 밤낮없이 전통 음식을 배워 식문화학으로 석사학위를 한 번 더 받았습니다. 그러나 학위는 공부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출발이었을 뿐입니다. --- 들어가는 말씀 중에서
조선 중기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허균은 우리나라 최초의 ‘식객’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음식을 품평한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여러 가지 산해진미 가운데 손꼽은 음식은 의외로 평범한 나물죽이었다. 바로 그 자신이 살던 지역인 강릉의 ‘방풍나물 죽’이다. ---p.17쪽, 방풍죽과 삼색도토리묵 중에서
세종대왕은 선친인 태종이 ‘내가 죽은 뒤, 상중이라 할지라도 세종의 수라상에는 고기를 떨어뜨리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고기를 즐겼다. 이러한 식습관과 평생 연구에 매진하며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생활습관 덕분에 소갈병(당뇨)을 앓았다. 반면 영조는 채소와 잡곡을 즐겼고, 대부분의 왕들이 하루 다섯 번의 수라를 받은 데 비해 그는 세 번만 수라를 받았다. 절제하는 식습관 덕분에 83세까지 장수하며,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왕으로 기록됐다. ---p.27쪽, 복분자 쇠고기구이와 봄동·수삼 무침 중에서
봄철엔 나른함 때문인지 보약을 지어 드시는 분들이 꽤 있다. 엄마로서, 요리연구가로서 보약보다 때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친다지 않는가. 3월에 각종 나물과 함께 꼭 챙겨 먹어야 할 음식이 하나 있다. 바로 청포묵이다. 청포묵은 녹두를 갈아서 체로 걸러 가라앉은 앙금을 모아서 쑤는데, 조선 후기 홍석모洪錫謨가 연중행사와 풍속들을 정리하고 설명한 세시풍속집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청포묵은 3월에 먹는 계절 음식으로 청포묵을 먹으면 여름 내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p. 47쪽, 청포묵과 단호박탕평채말이 중에서
여름이 제철인 가지는 세계인들이 두루 좋아하는 채소다. 약선으로도 사용되는데 성질은 차지만 지혈과 소종 및 해독 작용을 한다. 고혈압을 완화하며 동맥경화에도 효과가 있다. 이번에는 가지를 옛 조리서인 《수운잡방》에 나오는 모점이법을 이용하여 만들어보았다. 모점이법이란 가지를 4쪽으로 쪼개어 참기름을 두르고 지진 뒤 간장, 초, 마늘즙 양념장에 담그는 일종의 장아찌다. ---p.85쪽, 열무된장비빔밥과 모점이법 중에서
흔히 사람들은 ‘도미면麵’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면 요리를 상상한다. 도미면은 도미를 떠서 전을 부치고 고기와 채소와 당면을 어울리게 담은 뒤, 끓는 육수를 부어 끓이면서 먹는 전골 요리다. 도미면이라 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가는 전골냄비에 국수나 당면사리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p.107쪽, 음식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원래 잡채는 궁중음식이다. 광해군은 수라상에 잡채가 올라와야 수저를 들었을 정도로 유별나게 좋아했다고 한다. 최초의 한글 음식백과이며 현존 최고最古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정부인 안동장씨가 딸과 며느리들에게 전하기 위해 정리한 책인데, 여기에 기록된 잡채는 요즘 우리가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과 조리 방법과 재료가 다르다. ---p.113쪽, 음식디미방 잡채 중에서
외국인들에게 가장 맛있게 즐기는 한식이 뭐냐고 물으면 열에 예닐곱은 불고기를 꼽는다. 내·외국인 할 것 없이 선호도 높은 대표 한식 메뉴인 불고기의 원조는 바로 맥적貊炙이다. 고려시대로 그 기원이 거슬러올라가는 맥적은 된장에 돼지고기를 재워두었다가 구워내는 전통 음식이다. 된장이 돼지고기의 잡냄새를 없애고 구수하고 고급스러운 맛을 내기 때문에 불고기 못지않게 대우받던 요리다. 색다른 맛의 고기 요리를 원할 때, 손님상을 준비할 때 제격이다. ---p.171쪽, 맥적 중에서
여러 자리에서 많은 분들과 함께 내가 만든 음식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사의 내용과 음식은 매번 달랐지만 이 음식의 맛은 어떻게 내느냐,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이 음식을 한국인들은 자주 먹느냐, 언제 먹느냐 등 질문 공세와 적극적인 관심은 한결 같았다. 음식을 담은 그릇과 상에 깐 조각보, 꽃 장식, 내가 입고 있던 한복까지 모든 것을 감탄으로 바라봐주셨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를 궁금해해주셨다.
---p.174쪽, 우리 음식과 문화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