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인생이란
다음은 메이지 시대의 만담 작가 미나미 신지가 쓴 만담 중 하나이다. 도쿄 출신의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메밀국수를 좋아했는데, 국수를 먹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메밀국수는 꼭 소쿠리에 담아 먹어야 제 맛이지. 또 면은 젓가락 끝에 돌돌 말아 국수 끝머리에만 국물을 묻혀 후룩후룩 먹어야 하네. 국물을 너무 많이 묻히면 메밀의 향기를 느낄 수 없거든. 메밀은 향기를 맛보는 음식이야. 국물에 풍덩 담가 먹으면 메밀이 울지.” 그러던 그가 병이 들었다. 내일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들은 한 친구가 문병을 와서, “뭐 생각나는 거나 할말은 없나?” 하고 묻자, 그는 괴로운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답했다. “이 세상 살다간 기념으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국수 가락을 국물에 풍덩 담가 먹고 싶네.” 결코 속편하게 웃고 넘길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 과연 몇이나 죽음 앞에서 후회 없이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 p.16~17
인생, 사는 보람을 찾아서
사람은 ‘살아갈 가치나 의미가 있다’고 느끼거나, 스스로가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고 느낄 때 사는 보람을 가진다. 여기서 ‘필요하다’는 것은 산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따라서 직업도 세상사 흐름이나 수입을 떠나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찾아야 한다. 살아 있는 목적을 자각하고, 살아야 할 필요성을 확신하고, 그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해 나아가는 사람, 특정한 과업이 주어졌다고 느끼는 사람, 즉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사는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목표를 향해 나가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면목이 서지 않는다. 그런 이들은 바쁜 척만 할 뿐, 마음의 속삭임에 귀를 닫고, 스스로를 속이려 든다. --- p.40
살아남아라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오직 혼자만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내 고민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야말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통을 참고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되, 고통에서 도망치려 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직시하고, 고민의 극한까지 다다라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인생이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고, 내 움직임을 바라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자신의 생명에 대해 중대한 책임을 느끼게 되면 스스로의 생명을 쉽게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생명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의미가 있다. 심지어 고민과 죽음 속에서도 빛난다. 내 삶과 죽음 모두가 의미 있음을 알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 p.50~51
네 삶을 정당화하라
창조가치는 행동에 의해 실현되고, 체험가치는 세계(자연과 예술 등)를 수동적으로 수용할 때 나타난다. 특히 이 체험가치는 공동체 체험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연대성, 동료에 의한 체험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단순히 체험만으로도 가치를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베토벤 교향곡을 듣고 감동하거나, 좋은 경치를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런 경치를 보다니, 이런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니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창조성이 없거나 변변한 체험을 못해도 생명은 그 의미를 잃지 않는다. 아직 태도가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태도가치는 어떤 일이 운명처럼 불가피하게 닥칠 경우,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생명에 위협을 받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다다랐을 때 그 십자가를 어떻게 지느냐, 엄청난 위기의 순간에 놓였을 때 얼마만큼의 용기를 보이느냐의 문제이다. 즉 인간의 생명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의미가 있다. 의식이 있는 한, 그 인간은 태도가치에 대해 책임이 있다. --- p.136~137
쉰 이후, 진실의 꽃이어라
서른 이전이 젊음을 내세운 꽃이라면, 쉰 이후의 꽃은 ‘진실의 꽃’이다. 그리고 그 꽃의 아름다움은 젊음도 당해내지 못한다. 제아미는 또한 꽃 없는 꽃, 즉 시든 꽃의 아름다움을 논했다. “한 송이 꽃을 극찬할 때, 그 꽃이 시든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그 시듦은 꽃보다 우위의 것이다. 꽃이 시드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꽃피지 않은 초목이 시드는 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니다. 꽃이 핀다는 것이 중요하듯이, 이후 그 시든 모양 또한 중요하다.” --- p.263
나이 들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도록 만든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죽음이 찾아온다. 따라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시간과 경쟁하지 말고 순간을 즐기고, 고독을 느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오랜 인생 경험에서 얻은 지혜가 빛나는 삶…. 이제 노인들은 주변 사람들의 죽음 속에서 쓸쓸함을 느끼고 몸도 쇠약해지지만, 점차 현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욕심도, 얻을 것도 없는 해탈과 원숙의 경지에 이른다. --- p.263~264
죽음을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은 언젠가는 다가온다. 죽음은 인간을 소멸시킨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은 그때서야 처음으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해방되어,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묵묵히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면 구름, 바람, 꽃과 햇살과 같은 모든 것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유리 같은 세상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죽음이란 이 세상이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마지막이자 최고의 기회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멋진 선물일 수 있다. --- p.282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만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소설을 통해 마음대로 죽지 못하는 고통과 상처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보고, 맛보고, 웃고, 울고, 놀라는 능력을 모두 상실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인생은 평지처럼 단조로운 것이었다. 항상 같은 과거, 같은 경험, 같은 생각 속에서 몇 천 년이고 몇 만 년이고 세상과 이별할 수 없다니…. 그는 때 되면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불멸을 저주했다. 그에게 인생은 빈통처럼 무의미했다. 라틴어 ‘finis'는 종말과 동시에 목적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죽음이 없으면 목적도 사라지고, 그 생명은 내용과 의미를 잃는다. 즉 종말을 의식해야만 미래의 목적을 인정하고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도 생긴다. 그 의지할 곳은 인간을 타락으로부터 구원하며, 이를 잃어버린 사람은 감동하는 법조차 잊어버리고 무의미한 삶을 살 수 있다.
---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