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우리는 우상들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묘사되고, 또한 그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묘사되는 예들을 다수 살펴볼 것이다. 이 동일한 묘사의 목적은, 우상숭배자가 자신이 기대하는 생명을 주는 복을 경험하는 대신, 우상처럼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공허하고 반역적으로 되며 수치를 당함으로써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조롱하며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상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눈과 귀를 가졌다고 묘사될 때, 그 우상을 숭배하는 자 역시 눈과 귀를 가졌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고 그려진다. 동시에 나는 우상숭배자와는 반대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어떻게 복 가운데서 그분의 형상을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인간은 참 하나님이든지, 혹은 피조 질서 가운데 있는 어떤 다른 대상이든지 그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대상을 반영하게 된다. 그러므로 되풀이하자면 이 책의 주제는, 우리는 우리가 숭상하는 것을 닮음으로써 멸망을 초래하든지 회복을 얻든지 한다는 것이다.(제1장 중에서)
마태복음 15장, 마가복음 7장 및 관련 텍스트들이 이사야 6:9-10과 29:13을 예수 당대의 사람들에게 적용한다는 사실은, 이사야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자신을 바치는 우상숭배를 저지르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또한 그에 대한 형벌이 이사야 6:9-10에 있음을 상기하라. 여기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우상을 좋아하느냐? 네가 그것을 그렇게 좋아한다면 내가 너희를 그것처럼 되도록 해주겠다. 우상은 보지도 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영적인 생명도 전혀 없다. 따라서 너희가 절하는 그 우상처럼 너희도 영적으로 감각 없고 생명력 없이 될 것이다.” 예수 당대의 이스라엘은 그들이 헌신했던 공허하고 활력 없는 인간의 전통처럼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예수가 자기 당대에 전통을 가르쳤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직접 비유한 대로, 그들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마 23:27-29)같이 생명 없는 존재였다.(제6장 중에서)
요한은 인지적 수준과 감성적 수준 모두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은유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은유적 언어는 사람을 더 깊이 자극해서, 그로 하여금 인지적으로 집중하고 위험한 우상숭배의 실체를 더 잘 인식하도록 해준다. 만약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용소 상황을 담은 사진을 볼 수 있었다면 그들은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을 것이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한 파괴에 대해 추상적 설명을 듣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 파괴를 보여주는 실제 사진을 보는 것은 또 다른 방법이다. 요한계시록이 그림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림을 통한 설명은 단순한 추상적 소통보다 더 큰 충격을 준다. 이런 비유를 통한 소통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마취의 수단인 우상숭배적 연결을 피하도록 충격을 주기 위해 필요했다.(제9장 중에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대하게 만들려고 하면, 실제로 우리는 스스로의 에고를 더 크고 위대한 것으로 반영하게 될 뿐이다. 이런 관점은 이 책에서 살펴본 우상숭배의 개념과 잘 맞아떨어진다. 즉 사람은 자신이 헌신한 세상의 대상을 닮아가며, 이것이 그를 망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라는 우상을 반영하려고 하는 마음과 우리 자신을 본래보다 더 위대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심판을 통해 우리를 작아지게 만든다. 하지만 참 하나님의 영광을 확장하려는 마음과 그분의 영광을 반영함으로써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그 영광을 그분께 돌려드리려는 마음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에 참여하도록 해준다. 그 결과 하나님은 모든 피조 세계의 중심에 거하시는 유일하고 위대하며 훌륭한 분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종류의 선한 자기애도 존재한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그것을 원함으로써 우리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최고의 자기애의 표현이다.(제11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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