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기록
성경은 구속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역사서나 교리서와 같이 사건의 개요(槪要)만을 기록한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삶 속에 녹여 놓은 책이다.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이 이야기는 성경보다 앞서 언젠가 일어났던 실제 사건이란 말이다. 즉 성경은 독자들에게 단순히 진리를 선포하는 책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 속 사건으로 들어가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 안에 숨겨진 진리를 느껴 보도록 하려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읽기 위해서는 기록 이전에 먼저 사건(event)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고 읽어야 한다. 또 단순히 문장을 읽기보다는 그 배경과 장면들을 머리에 그리면서 읽어야 한다.
사건의 내용을 담은 이야기라면 거기에는 사람들의 행동, 대화, 감정, 삶의 형태 그리고 정황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적 내러티브인 성경은 인물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인물이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거기엔 삼위 하나님도 포함된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드라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람을 읽으며 드라마를 볼 때 재미를 느끼고 또 자신의 상황에 적용해 가면서 감동하게 되듯이, 성경도 그렇게 읽어야 한다.(17-18p)
---「내러티브로 성경 읽기란 중에서」중에서
사랑이 눈물 되어 흐르던 날
“요한복음 21장 9~17절”
이연길 목사
이른 아침, 막 동이 터올 때, 호숫가에 한 사람이 서성이고 있습니다. 생선을 사러 온 분인지, 아니면 누구를 기다리는지, 그분은 동이 터오는 호수를 바라볼 뿐입니다. 마침 싸늘한 아침 공기를 가르고 배 한 척이 호숫가로 다가옵니다.
배가 약 60미터쯤 접근해 왔을 때, 그분은 배를 향해 외쳤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사실 이것은 “애들아! 너희들 고기를 못 잡았지?” 하고 묻는 물음입니다. 그들은 ‘저분이 우리가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것을 어떻게 알았지? 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이윽고 해변에서 들려온 소리,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잡을 것이다”였습니다.
해안에서 60미터 떨어진 곳에 무슨 고기가 있을까요? 그들에게 이상한 예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성경은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6절)고 합니다. 그제야 사랑하는 제자가 “주님!” 하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예수님께로 헤엄쳐 갔습니다. 호숫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육지에 올라온 베드로와 제자들의 눈에 맨 먼저 띈 것은 바로 ‘숯불’이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9절).
왜 베드로의 눈에 예수님이 아니고 숯불이 먼저 띄었을까요? 예수님을 향하여 헤엄쳐 온 베드로의 눈에 숯불이 그처럼 강력하게 비쳤다는 것인데, 왜 그랬을까요? 어째서 요한복음 저자는 숯불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답을 찾기 위해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선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전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첫 번째로 나타나신 것은 요한복음 20장 19~23절, 제자인 도마가 없던 자리에서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19~20). 두 번째 나타나신 이유는 도마를 만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나타나신 경우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나타나신 일은 전혀 다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를 특별히 만나셔야 했을까요? 왜 하필이면 숯불을 피우시고 그 위에 물고기와 생선을 올려놓고 만나려고 하셨을까요?
숯불이란 헬라어로 ‘안뜨라키아’입니다. 그런데 이 ‘안뜨라키아’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때 쬐였던 그 숯불과 동일한 단어입니다(요 18:18). 요한복음 저자는 의도적으로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가 그 숯불을 보면서 자기가 주님을 부인하던 그날 새벽을 생각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가야바의 집에 있던 숯불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는 다시 숯불 앞에서 주님과 대면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가장 수치스럽고 잊고 싶은 과거를 그 앞에 펼쳐 놓으신 것입니다.---「53-55p」중에서
◈ 설교 포인트
핵심 모티브 찾기
본문을 읽다가 평생 처음 ‘숯불’이란 단어가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물고기와 빵이 거기 놓였다는 점도 특별했다.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숯불(안뜨라키아)’이 요한복음 18장 18절에 나오는 단어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가슴이 뛰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만난 일은 단지 부활을 증거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라 베드로의 치유 사건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본문 내용 읽기
핵심 모티브를 놓고서 본문을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자세하고 깊이 있게 읽어 가자, 불을 피워 놓고 제자들을 기다리는 주님의 마음이 가슴속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적의 물고기를 잡게 하심으로 자신을 알리는 주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마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반응을 기다리셨을 것이다. 그가 헤엄쳐 오는 것을 보시면서 벌써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셨다. 그런데 정작 뭍으로 올라온 베드로의 눈에 먼저 띈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숯불이었던 것이다. 이 역시 특이한 부분이었고, 조반을 먹는 동안 주님과 제자들 모두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점도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셨기에 이렇게 물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을 곱씹고 또 뒤집어 보면서,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고백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본문에서 갈등 찾기
본문의 핵심어는 ‘숯불’이다. 따라서 숯불을 중심으로 구절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헤엄쳐 왔는데, 정작 그의 눈에 띈 것은 ‘숯불’이었다는 데 뭔가 모순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불을 피우셨으며 물고기와 떡을 일부러 거기에 올려놓으셨다고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물고기(눅 5:1~11) 그리고 떡(요 13:21~38)은 숯
불과 함께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주님은 왜 이런 이벤트를 마련해 놓으셨을까?’ 이제 그 이유를 차분히 풀어 볼 차례다.
갈등을 풀어 가기
주님이 마련하신 이벤트를 바로 설명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그보다 먼저 예수님과의 사랑의 대화를 설명하고 돌이켜 이벤트를 풀어 가는 방식도 좋을 것이다. 본 설교에서는 ‘베드로의 치유’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순리대로 풀어 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조반을 먹으면서 침묵했던 시간은 베드로를 치료하시는 순간이었다고 본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사랑을 고백하셔서 그에게 신뢰를 표하시고, 사명을 맡기셨다. 그리스도의 진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우리 삶에 적용하기
이 설교를 통하여 청중이 간접 치유를 경험하도록 했다. 동시에 첫 사랑을 잃어버린 청중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고자 했다.(60-61p)
---「chapter3. 내러티브로 만나는 말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