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는 저항이론·저항운동이 아니라 협상과 공존의 사유이다
나는 페미니즘은 저항이론·저항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생겨난 지 3백 년도 안 되었지만, 한국에 자본주의가 들어온 지 1백 년도 안 되었지만,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하물며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부장제의 위력으로부터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 p. 40
여성주의는 여성도 인간이라는 가장 급진적인 주장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시민·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 언어의 내용은 물론이고, 담론의 형성 구도 자체가 붕괴된다. 여성이 인식 주체가 되면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가 흔들리고 재구성된다. 그러니, 어찌 여성주의가 위험하지 않을 수 있으랴. --- p. 34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누가 나더러 여성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라는 말을 소개한다. “착한 여자만이 천당 갈 수 있다.”가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생각이라면, 여성주의는 “나쁜 여자가 천당 간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와 거리가 멀다. 여성주의는 남성을 미워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든 증오든 이제까지 남성에게 쏟았던 기운을 여성 자신에게 돌릴 것을 제안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우리나라 부모나 교사들 중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이라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천당에 가기 위해 남자에게 순종하며 ‘착한 여자’로 살기보다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는 능력 있는 ‘나쁜 여자’로 살면서 어디든 가길 바란다. --- p. 69~70
성녀(聖女)와 성녀(性女)로 나뉘는 여성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분류, 분리되는 방식인 성녀(聖女 혹은 石女)와 성녀(性女), 정숙한 여성과 순진한 여성, 본처와 애첩, 아내와 애인……은 배타적인 범주 같지만 남성을 위한 여성의 기능이라는 점에서 같다. 여성은 상황에 따라 ‘정숙하면서도 섹시한’, 이 모순된 요구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남성 판타지가 원하는 것은 성애화된(sexualized) 모성, 모성화된 성애(sexuality)이다. 대개의 부부 싸움, 아내에 대한 폭력은 아내가 ‘어머니 같은 이해심’과 ‘매춘 여성의 섹시함’을 동시에 감당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유흥업소를 찾는 남성 고객이 매춘 여성에게 사고자 하는 것은 단지 그녀의 몸이 아니다. 그는 그녀의 배려, 대화, 보살핌 그리고 ‘오빠’, ‘당신이 최고’라는 칭찬과 격려를 원한다. --- p. 55
매 맞는 여성들은 왜 죄의식을 느낄까
국가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 역할 규범이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남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피해자에게 해결사 역할까지 요구하는 것은 아마도 가정폭력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 p. 124
한국사회는 폭력당하는 여성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담론 구조도, 그들을 지지하는 공동체도 없다. 그들의 고통은 가족의 문제가 되거나, 자녀의 고통이 강조될 때만 부수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그래서 고통을 인내하는 여성들의 능력은 지나치게 과장되어 왔고,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 자체에 죄의식을 느낀다(“나는 왜 참을성이 없을까?”) --- p. 127
여성주의는 ‘차이’와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기존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목소리가 전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대안) 세계가 가능하며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일(단일)한 것으로 군림해 왔던 서구 남성 중심의 목소리는 급속히 상대화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기존의 사유 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라고 믿는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 p. 44
여성주의 언어란 무엇인가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 세계는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언어는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약 5천 년 동안 남성은 재현 주체였고 여성은 재현 대상이었다.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다. …… 여성은 흔히‘곰과 여우’, ‘본처와 애첩’, ‘성녀(聖女)와 성녀(性女)’, ‘어머니와 창녀’로 구분되지만, 남성은 그렇지 않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계급과 정체성은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지만, 여성의 지위는 몸/성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정숙한 여성’과 ‘문란한 여성’이라는 말은 있지만, ‘정숙한 남성’ ‘문란한 남성’이라는 말은 없다. --- p. 72, 74
남자는 외롭다? 여자는 더 외롭다
물론 남자는 외롭다. 어떤 면에서는 감정 표현을 억압당해 온 남성들이 더 외로울 수도 있다. 남성의 고통에 공감하는 《아버지》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은 그만큼 외로움을 호소하는 남성들이 많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남성의 외로움은 많은 경우 남성과 남성 간의 갈등에서 발생하지만, 여성의 외로움은 남녀 간의 문제에서 발생한다는 면에서 다르다. 또한 남성의 외로움은 보살핌의 가치나 감정 영역을 폄하해 온 남성 문화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남성 외로움의 ‘가해자’가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들도 타인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감정 노동의 영역에 참가하는 것이 남녀 모두가 사는 상생의 길이다. --- p. 91~92
‘순결한’ 피해 여성도, ‘타락한’ 성판매 여성도 없다
한국 남성들이 “우리도 일본 여자를 강간하자.”라고 심심찮게 말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볼모로 한 남성 정치학의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을 의미하게 되고, 일제의 경우처럼,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이 공식적인 전쟁 정책이 되는 것이다. ‘군 위안부’사건은 민족 모순이자, 여성 인권 침해이다. 이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원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그 집요한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 --- p. 141
여성의 사회 진출?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양성 평등’이나 ‘여성의 사회 진출’은 내가 피하는 말들 중 하나다. ‘북핵 문제’처럼 이러한 용어들은 자신의 고통을 지배자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모든 사회적 약자의 딜레마를 압축한다. ‘양성 평등’은 인간이 두 가지 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인식 체계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양성구유자로 태어나는 사람의 존재를 비가시화하고, 양성의 경계를 문제화하는 트랜스젠더 같은 성적 소수자를 ‘제3의 성’으로 전락시킨다. ‘여성의 사회 진출’? 그렇다면, 여성이 생활했던 가정은 사회가 아닌가? 가정과 사회를 상호 배타적인 공간으로 상정하는 이러한 논리 때문에 가정에서 여성이 폭력을 당해도 ‘사회의 질서’인 인권이나 민주주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 p. 103
“그들이 직접 말하게 하라”
여성주의 사유 방법의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라.”였다. 우에노 치즈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여성의 역사가 문서화된 역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다 보니, 그동안 역사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해’ 쓰여진 문서나 재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성들이 쓴 것은 여성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와 관련된 남성들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를 남성을 여성주의자로, 여성을 성판매 여성으로 바꾸어 본다면 무리일까? 이런 치환은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 비장애 여성과 장애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관계에 모두 적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p.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