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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고요하지 않다 1

숲은 고요하지 않다 1

: 이종찬 회고록

이종찬 | 한울 | 2015년 09월 1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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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 top100 10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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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9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476쪽 | 692g | 153*224*30mm
ISBN13 9788946060500
ISBN10 89460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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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이종찬
호는 삼인(森人)이다.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아버지 이규학(이회영의 아들)과 어머니 조계진(대원군의 외손녀)의 3남으로 태어나 광복 이후 가족과 함께 귀국해 서울에 정착했다.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 제16기로 입교해 졸업과 함께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초등학교에서 만난 윤장순과 소위 시절에 결혼해 이후 1남 2녀를 두었다.

1972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중국의 행정제도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3년부터 영국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참사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해, 중앙정보부 국제문제담당 부국장, 총무국장, 기조실장을 두루 거치면서 10·26 사태 이후 중앙정보부 개혁에 앞장섰다.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하게 되면서 중앙정보부를 떠났으며,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서울 종로·중구)에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제14대 국회의원까지 4선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민주정의당 원내총무, 국회 운영위원장,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한영의원친선협회 회장, 한중문화협회 회장, 정무1장관, 당 사무총장 등 중책을 역임했다.

3당 합당 이후 1992년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불공정 경선에 항의해 경선을 거부하고 탈당했다. 같은 해 새한국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 및 대통령 후보에 선임되어 대선에 도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부총재가 되어 1997년 제15대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 직후 제15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되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야 간 정권 인수·인계 작업을 지휘했다.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1999년 ‘국가정보원’으로 명칭 변경) 부장으로 취임해 17여 년 만에 국가 정보기관으로 돌아왔다. 1999년 다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부총재로 위촉되었으며, 2000년 새정치국민회의가 해체됨과 동시에 새천년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새천년민주당 고문직과 서울 종로지구당 위원장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 동북아경제연구소(Northeast Economic Forum)와 하버드 대학 한국학연구소(Korea Institute)에서 한국의 물류 발전 가능성 등에 관해 연구했다. 2005년 한국선진화포럼 창립에 참여해 이사장으로 활동했으며, 2010년부터는 IBC(International Business Center)포럼의 이사장으로도 재직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독립운동사를 기리는 데도 각별한 애정을 쏟아온 이종찬은, 국회의원 시절 독립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추진위원과 민주정의당 민족사관정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올바른 역사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조부인 우당 이회영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자 우당기념관을 세우고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를 창립했으며, 현재도 우당장학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가족을 후원하고 있다. 2005년에는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으며, 2015년부터는 사단법인 광복회 이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건립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며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념하고 알리는 데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보국훈장 삼일장, 홍조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 영국 정부의 CBE(Commander of British Empire) 훈장을 수여받았다. 저서로는 『민족의 종을 울리며 민주의 탑을 쌓으며』(1987), 『개혁과 온건주의』(1987), 『무엇을 말했는가: 이종찬 의원 국회발언 모음』(1992), 『디지털로 확 바꿔라』(2000), 『세계로 가는 길목을 잡아라』(200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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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의 내막 __
나는 1949년 여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세 가지 사건, 즉 ‘국회 프락치 사건’과 ‘반민특위 강제 해체’, 그리고 ‘백범 암살’ 음모가 모두 새로 등장한 공안 세력이 벌인 일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에 이승만의 사전 승인이 있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이승만 권력의 비호 아래 특수 조직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를 세칭 ‘88구락부’라고 했다. 이는 신성모와 같이 이승만의 직계에 해당하는 새로운 아첨 세력과 송진우·장덕수의 암살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던 한민당 세력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중간층으로는 일제하의 경찰과 군 출신들이 있었다. 즉, 반민특위 강제 해산 이후 반격을 받지 않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을 뿌리째 제거하려 기회를 노리던 김태선, 김운하, 노덕술, 전봉덕 등의 경찰 세력과 일제에 충성을 바치다가 이제는 신생 대한민국의 군부를 장악하려 했던 채병덕, 원용덕, 김창룡, 장은산 등의 군 세력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상층의 정치 세력과 중간층의 군경 세력이 모두 이승만을 정점으로 신권력층을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그 하부선으로 김지웅, 홍종만 등이 외곽에 있고, 다시 그들의 하수인으로 안두희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음모의 개략적인 그림이었다. --- p. 66

육사 면접에서 겪은 모욕 __
나는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러고 나서 직접 육사에 가서 구술시험을 봐야 했다. 이때 필요한 서류가 추천서였다. 정부의 국장급 이상 공무원이나 군 장성의 추천이 필요했다. 나는 아버지의 동지이자 광복군 출신인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의 추천서를 받았다.
구술시험 당일 내 차례가 왔다. 면접관은 생도대장 이용 장군과 참모장이었다. 그들은 일본 지원군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민영구 제독과 김관오 장군을 어떻게 아는가?”
“그 어른들은 저희 집안과는 중국에 살던 시절부터 세교가 있던 분들입니다.”
나의 대답에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귀관의 집안도 소위 독립운동한 집안인가?”
상당히 경멸조의 반문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내심 뜨거운 분노가 치밀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에게 적의를 갖고 있는 듯했다. 면접시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만약 불합격한다면 그것은 성적이 아니라 우리 집안이 독립운동 가문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몹시 실망했다. 동시에 나는 이 말을 부모님께 해야 할지, 나 혼자 되삼켜야 할지 고민했다. 내가 모욕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 들어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던 자들이 득세해 장군이 되고, 낯선 땅에서 목숨 바쳐 싸우던 독립운동가는 오히려 멸시를 당하는 이런 모순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 p. 107~108

이승만 정권의 몰락 __
드디어 운명의 날인 4월 26일, 월터 매카너기 주한 미국 대사가 경무대로 들어갔고, 얼마 후 이승만 대통령은 손을 들고 말았다. 하야하겠다는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올 데 갈 데 없어 피신하고 있던 경무대 경내의 비서관 숙소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의 친구 이강석 군이 자기 부모와 아우를 쏘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비참한 기사가 실린 호외가 삽시간에 서울 시내에 나돌았다.
나는 국민의 쌓였던 불만이 폭발하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목도했다. 군중의 무서움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면 차후에 이를 누가 나서서 수습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민주당이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군이 나설 수 있을까? 어느 쪽이 옳다고 선뜻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승만이라는 탐욕적인 거인은 미웠지만, 그가 쓰러진 뒤에 닥칠 일들에 대해 제대로 준비가 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p. 152

박정희에 대한 인상과 5·16 군사정변의 날 __
1960년 1월, 육사 4학년 시절에 우리는 부산 군수기지사령부에 현지 교육차 갔었다. 부산역에 도착했더니 크지 않은 키에 겨울인데도 검은 안경을 쓰고 공군 점퍼 차림을 한 사령관이 부산역까지 나와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바로 박정희 소장이었다. ……
얼마 후 사관생도 인솔단장인 박창암 대령이 박정희 소장을 수행해 각 방을 순회했다. 그 뒤로는 박 소장의 부관과 휘하 병사들이 빵과 과일을 넣은 상자를 들고 대기하다가 지시에 따라 한 봉지씩 나누어 주었다. 박 장군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했다. 그때 박 장군의 표정은 근엄했지만, 왠지 모르게 친근감을 주었다. 이렇게 숙소에까지 찾아와 격려해주는 장군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깊은 인상이 남았다. ……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생도대 부대장인 박창암 대령과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박 대령이 느닷없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전국의 부대를 많이 다녀봤지만 어제 만난 박 장군처럼 주관이 뚜렷하고 올바른 국가관을 가진 장군을 일찍이 찾지 못했네. 유능한 분이야. 어제 우리는 대화를 많이 나눴지.” ……
1961년 5월 16일, 전방의 수색중대 소대장을 하다가 28사단 80연대 1대대 소대장으로 전보된 직후였다. 우리 대대는 예비대대여서 교육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부대 내 숙소의 잠자리에서 아직 일어나기 전 이른 아침이었다. 인접 소대 소대장 조 중위가 방문을 두드렸다. “서울에서 혁명이 일어났어! 방송 들어봐!” --- p. 156~157

긴급통화조치법을 주도한 유원식, 그리고 김종필 __
미국 측 대표는 제임스 킬렌 대외원조처(USOM: 유솜) 처장이었다. 그는 긴급통화조치에 대해 즉각 격렬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에게는 원조 중단이라는 비상한 수단이 있었다.
이렇게 미국 측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최고회의 내부에서도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동하 재정경제위원장은 자기가 전혀 모르는 가운데 비상조치가 취해졌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이주일 최고회의 부의장도 대책위원회 회의석상에서 노골적으로 유원식을 몰아세웠다.
회의가 끝난 뒤 유 장군은 분을 참지 못했다. “알라스카 놈들, 일제히 반격을 시작했군!” 그는 공공연히 함경도 출신 장군들을 맞받아 비난했다. 책임을 함께 져야 할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이 그때 유 장군에게 메모를 전해왔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유 장군의 노고에 위로를 보냅니다. 일단 출발한 이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되기 바라며 유 장군이 이를 잘 수습하리라 믿습니다. 누차 말씀드렸지만 우리의 생일은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우리의 제삿날은 같다는 저의 결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
유 장군이 그날 나에게 이 메모를 보여주었다. 아마 ‘나는 외롭지 않다’는 제스처였을지도 모른다. 편지지보다 작은 메모 용지였다. 이걸 보면서 “제삿날이 같다”라는 표현이 참으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김종필은 화폐개혁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발을 뺐다. --- p. 189

동베를린 사건 처리의 오류 __
동베를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안겨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지식인이 정신적으로 황폐해졌다. 많은 관련자가 그 후유증으로 일생을 불행하게 산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 그들 중 상당수는 남북한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경계에 서서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경계인’이 아니라, 경계에 치어 매몰된 ‘반(反)경계인’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의 처리 과정을 보면서 지식인들을 더욱 이성적으로, 나라의 먼 미래를 내다보면서 다루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당시의 남한에 비판적이었던 만큼 그 이후의 북한에 대해서도 자기 할 말을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기 이전에 인권이 유린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자기 목소리를 잃었다.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졌던 것이다.
사전에 전혀 모르다가 임석진의 자수로 전모가 드러나는 바람에 체면을 구긴 김형욱의 광적인 분풀이 때문에 나라의 중요한 일꾼이 될 만한 분들이 일생을 망쳤던 것이다. 이는 개인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손실이기도 했다. 지금도 국정원이 이런 식의 우를 범하지 않기를 간곡히 원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이 아닐 것이다. --- p. 171

이후락과 홍콩에서 보낸 사흘 __
마침 12월 19일 홍콩행 캐세이퍼시픽이 있어 이를 타고 대만 비행장에 잠시 체류할 때였다. 대기실에 들어서는데 저 멀리 한쪽 구석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중절모를 눌러쓴 사나이가 눈에 띄었다. 뒤돌아 앉아 있었지만 이후락 전 부장이 분명했다. ……
“부장님, 여기서 뵙게 되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는 것이 좋은지 몰라 한참 망설였습니다.”
“아, 반갑소, 미스터 리! 어디 가는 길이오? 참, 부친상을 당했다지요?”
“네, 장례 치르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홍콩에서 환승하기 위해 이 비행기를 탔습니다.”
“홍콩에 누가 나오기로 했소?”
“아니요. 단순히 환승만 하니 보세구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가면 되지요.”
“아, 잘됐소. 나도 홍콩 가는데 좀 도와주게. 나 누구에게도 연락 안 했고 호텔 예약도 안 되어 있어요.”
나는 그 순간 그가 몰래 나온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동행하는 사람도 없고 단벌 신사같이 짐도 전혀 없었다. 나는 혹시 이분이 망명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공항을 몰래 빠져나온 것이었다. 마침 중앙정보부의 공항 책임자가 그의 동향 출신 직계여서 비밀리에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는 것이다. 당연히 본부에서는 그의 출국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홍콩에서 4~5시간 기다려 다음 항공편으로 환승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주저되었다. 그러나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내 일정에 차질이 생겨도 일단 의리를 지켜 그의 난처한 사정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팔자에 없는 그의 임시 수행원이 되었다.
나는 이후락과 함께 홍콩 공항에 도착한 뒤 안내 데스크로 가서 바로 호텔을 예약했다. 가장 유명한 힐튼호텔 스위트룸을 얻었다. …… 그는 재삼재사 일체 외부로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고, 나는 그날부터 꼼짝 없이 그의 옆에 붙어 시중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호텔 식당에 먼저 가서 동정을 살폈다. 공교롭게도 한국 국회의원들이 우글거렸다. 임충식, 차지철…. 부리나케 방으로 돌아와 상황을 알렸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그날부터 우리는 식사를 모두 방에서 하면서 응접실에서 TV 시청 등으로 무료하게 지냈다. 그도 아무런 대책 없이 나왔는지 특별히 누구에게 연락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자연히 그와 대면해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 과장! 자네가 영국 가기 전에 발령이 취소되고 혼나게 되었는데 내가 못 하게 했지. 그 일 알고 있나?”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사정은 이랬다. 1973년 초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던 윤필용 장군이 ‘후계자는 이후락’이라는 말을 취중에 발설해 그만 그 말이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다. 진노한 박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윤 장군을 조사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것이 세칭 윤필용 사건의 출발점이었다. 그때 이후락도 하마터면 조사를 당할 뻔했다.
그런데 윤필용이 구속된 뒤 이번에는 이후락이 반격하려 했다. 그때 이용택 수사국장이 “강창성과 가까운 이종찬을 족치면 강 장군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라고 건의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후락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고 황당했다. 이용택이 어떻게 그런 건의를 할 수 있었을까? 그 자신이 한때 중앙정보부 외부에서 강창성 장군의 사조직으로 활동하면서 나를 통해 중앙정보부에 돌아오려 노력했던 사람인데 어느 날 돌아서서 그런 계획을 세웠다니 참으로 무서운 세상임을 실감했다. 이후락은 설명을 계속했다.
“이용택의 건의를 받고 나는 공연히 이런 싸움 틈에 젊은 일꾼 하나 잃으면 안 된다고 제지했네. 내 말에 김치열 차장도 같은 의견이라고 동의하더구먼. 그때 내가 자네를 조사하라고 동의했으면 오늘날 자네에게 이런 신세도 지지 못할 뻔했네. 하하.”
그때 만약 이후락이 이용택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나를 잡아 가두고 고문을 해서 무슨 시나리오든 꾸몄을 것이고 나는 반병신이 되었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그 뒤 얼마 안 가서 이용택은 결국 ‘보안사 휘발유 매각 사건’을 어마어마하게 부풀려 조사한 끝에 강 장군이 보안사령관에서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되도록 복수전을 펼쳤다.
예정에도 없던 임시 수행원으로 사흘째 지내던 12월 21일 저녁, 나는 걱정이 되었다.
“부장님! 다음 일정을 어디로 결정하셨습니까?”
“나, 아무데도 결정한 곳이 없네.” --- p. 265~267

박정희 시해 그리고 신군부 출현은 예견되었다? __
이런 긴장된 시점에 나에게 또 하나의 외국 문건이 들어왔다. 한국의 정치 정세가 마치 4·19 혁명 직전과도 같이 혼미한 상황에서 미국의 한국 전문가인 랠프 클러프 박사가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제거(decapitate)’될 경우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인지를 분석한 글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이 물러난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글이 미국 조야는 물론, 한국 내에서도 은밀하게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글 가운데 특히 나의 눈길을 끈 대목은 클러프가 ‘decapitat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었다. ‘목을 자른다’는 뜻의 이 말은 그냥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타율적으로 물러난다는 함의가 강했다. 즉, 그 글은 박 대통령이 강제로 물러날 수도 있다는 전제를 담고 있었다.
이어 클러프 박사는 그렇게 될 경우(박 대통령이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울 경우) 사후 수습을 할 수 있는 그룹이 네 개 있다고 보았다.
“한국에는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네 개의 기둥이 있다. 즉, 군, 관료 조직, 기업가, 중앙정보부 등이 남한의 정치적 변혁에서 안전판 역할을 할 것이다.”
매우 주목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의 혼란을 진정시킬 네 개 집단을 거론하면서 정당이나 정치인은 꼽지 않았다. 그는 박 대통령이 물러날 경우 여당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우며, 야당은 집권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클러프는 자신의 글 마지막 부분에서 “그러나 네 개의 기둥을 연결하는 고리가 필요하다. 그 기본 주체 설정이 요망된다. 예를 들면 일본의 요시다 학교 같은 인재의 고리가 필요하다”라고 분석하면서 “설령 정치적인 격동이 닥쳐도 네 개의 기둥이 건강하면 혼란을 예방할 수 있다”라고 결론 내렸다.
박 대통령이 불의에 세상을 떠난 뒤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정치는 더 혼란해지고 경제는 뒷걸음질할 때 나는 클러프의 판단을 여러 번 회상했다. 특히 그가 지적한 대로 그 뒤 신군부가 등장해 네 개 기둥의 고리 역할을 하면서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보며 클러프의 판단이 적중한 데 놀랐다.
당시 중앙정보부 국제 담당 부서의 부국장이던 나는 이 보고서의 요지를 정리해 원문과 함께 보고했지만 당시 이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박정희의 철통같은 정권에 위기가 온다고 예측하지 못했고, 더욱이 ‘decapitate’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불경하게 생각할 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클러프가 어떻게 그런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풀지 못했다. --- p. 318~319

민주정의당 창당 __
나는 과거 공화당을 사전 조직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새 정당을 사전 조직하는 일에 내가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스러웠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나로서는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기회에 우리 정당사에 남을 만한 작품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역발상이었던 셈이다.
당시 나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 정당사는 여야가 해방 이후 일란성 쌍생아로 태어나 한 뿌리였다. 정강과 정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보수양당제는 시대 변화와 더불어 한계를 노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동안 기존 정당에서 소외되었던 제3세력들을 모아 개혁 정치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국민에게 신선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제3의 길, 이것이 신당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불가피하게 사전 조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사후에라도 국민에게 납득시키고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발상이 당시 창당 멤버 전체의 생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허화평과 나는 이런 생각을 같이했다. --- p. 365

조영래 구하기 __
계엄령하의 긴장된 분위기가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을 때였다. 나는 민정당 창당 작업에 몰두해 사무실보다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날 조영래 군이 나를 찾아왔다.
“저는 경기고 61회 후배로 선배님의 도움을 받고자 왔습니다. 사실 그동안 수배를 당해 6년간 피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 값진 희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사법연수원 재학 중에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법연수원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제 세상도 바뀌었고, 저도 새롭게 출발하고 싶습니다.”
조영래 군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묵직했다. 그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 군과 장기표, 이신범 등이 체포되어 조사받을 당시의 수사관들로부터 그의 심문받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절대로 비굴하지 않았고, 자기 행동에 책임진다는 태도였다고 모두들 칭찬하는 말을 했다. ……
나는 조영래 군을 진정으로 돕고 싶었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유난히 정의감이 강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이미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도했고, 서울대 법대에 다닐 때는 학원출입 정보형사에게 학내 정보를 제공한 배신자를 직접 ‘응징’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했다. 적어도 이런 정도의 정의감이 전제되지 않으면 법을 전공해도 참된 법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며칠 뒤 나는 직접 법원행정처로 서일교 처장을 찾아갔다. 사회 분위기가 삼엄하던 시절, 중앙정보부의 간부가 찾아온다는 사실에 서 처장은 긴장하기도 하고 의아하게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내가 먼저 자세를 낮추고 인사했다. ……
“오늘 찾아뵙는 것은 조영래 군이라고, 장재룡 군과는 고등학교 동기인 우수한 인재에 대해 부탁을 하나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서 교육받던 중에 서울대 학생운동에 연루된 사건이 터져 그만 연수 중도에 구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실형을 살았고, 그 뒤에 또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되었던 인물입니다. 최근 수배가 해제되었고, 이제 새로운 환경에서 국가에 기여하고자 사법연수원에 복교하기를 희망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세한 신상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본인도 이제 어엿한 법조인으로 인생을 새 출발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그를 믿고 처장님께 선처해주십사 부탁을 드리러 왔습니다.” ……
며칠 후 서 처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조영래 군에 대해 자세히 기록도 보고 실무진의 의견도 들었습니다. 가급적 구제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 군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취급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관에서 의견서를 보내주어야 하겠습니다.”
“네, 알았습니다. 필요한 절차를 밟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즉시 현홍주 정보정책국장을 찾아갔다. 현 국장은 실무에 밝을 뿐 아니라 세상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좁게 보지 않는, 매우 넓은 시야를 갖고 있었다. 이 정도의 일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아 기탄없이 말했다.
“조영래 군 알지요? 나에게는 고등학교 후배일 뿐이지만 현 국장에게는 서울법대까지 후배이니 잘 배려해주십시오. 사실은 나를 찾아와서 사법연수원에 복교하고 싶다고 합디다. 그전부터 이런 재목은 우리나라의 인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만나보니 경솔한 운동권 같지 않고, 신중하게 우리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사람 같습디다. 이제 세상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인물 하나 구제합시다.”
“저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지도급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재목이라 생각하지만 실무적으로 한번 검토를 해야겠습니다. 또 내부 절차도 필요할 겁니다.”
현 국장이 농반진반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 조영래 군에 대해 이 선배께서 보증하겠습니까?”
“이렇게 부탁할 때는 보증한다는 말이나 같지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과거 유신 시대의 시국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거나 수배가 해제되었다. 그렇게 해서 조영래 군도 수배에서는 해제되었지만, 나를 찾아왔을 때는 이미 정국이 다시 긴장되면서 계엄이 확대된 시점이었다. 불가피하게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합수부)와의 업무 협조가 필요했다. 나는 합수부에 쫓아가 이 문제를 신속히 처리해달라고 부탁했다.
8월 21일, 드디어 합수부에서 잘 처리해서 중앙정보부로 넘겼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26일 현 국장으로부터 중앙정보부 의견으로 ‘가(可)하다’는 통보를 법원행정처에 보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우선 기뻤다. 조영래 군과 같은 인재가 자신이 원하는 법조의 길로 다시 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운 것이 보람 있었다. --- p. 392~396

이종찬의 ‘51% 주의’ __
제11대 국회는 긴장되고 삼엄한 분위기에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말깨나 하던 의원들은 모두 ‘정치풍토쇄신법’으로 묶이거나 정계를 은퇴했고 신인이 많은 국회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된 국회에서 여당 총무마저 경화된 태도를 취했다면 아마 의회민주주의는 작동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의 모토는 ‘51% 주의’였다. 여당은 51%에 만족하고, 야당에게도 49%의 역할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방침이었다. 이런 접근 방식 덕분에 국회의 토론의 장 기능이 다시 살아났고, 정부에 대해서도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여야가 51% 주의를 존중한다면 ‘국회선진화법’이 왜 필요할까. --- p. 428

전두환은 독재할 사람이 못 된다? __
얼마 전에 5공 출범 당시 핵심 실세 가운데 한 사람이 전두환 정권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고 들었다. “전두환 대통령이나 5공에 참여한 신군부 인사들은 기본적으로 독재할 사람들이 못 된다. 그들은 육사 4년간 미국식 교육을 받아 체질적으로 민주주의와 법치가 몸에 배어 있었다. 12·12를 단행했고, 5·17 계엄 확대 조치와 광주를 강권 진압해 집권은 했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멈칫했을 뿐, 그 후 초법적인 혁명적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개혁 조치든 법을 먼저 만들고 그 법에 따라 가려는 것이 그들의 태생적인 한계였다.”
이런 말에는 나도 일정 부분 공감한다. 1981년 3월, 비록 체육관에서 치른 선거였지만 새 헌법 절차에 따라 정식으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 앞에는 두 가지 미묘한 금단의 문지방이 놓여 있었다. 자칫 이를 넘어서려는 유혹에 휩싸일 수도 있었지만,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해 그 앞에서 멈춰 서곤 했다. 하나는 단임 약속을 지킨다는 강박관념이었다. 어떻게 하든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기고, 살아서 청와대를 나오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의 최대 목표였다. 다른 하나는 집권 시기의 성과물에 얽매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분단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이를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다는 집념이었다. --- p. 453~454

노태우에 대한 호의, 그 결과는 __
“서울 선거는 대단히 중요한 선거입니다. 그런데 서울 지역에 두 사람의 새 인물을 공천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모두 훌륭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출마할 지역은 우리가 지난 선거에서 야권에서 영입한 인사들로 당선된 지역입니다. 그분들에게 물러나라 한다면 각하께서 일회용으로 야권 인사를 써먹고 버린다는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한 분은 윤보선 대통령 측근이요, 또 한 분은 혁신계의 지도급 인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하필이면 육사 나온 두 분, 그것도 모두 대구 경북고 선후배를 천거하셨습니다. 남들이 이를 두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결국 각하는 사람을 쓰고 버린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고, 또 그 후임은 모두 육사 출신으로 바꾼다는 오해를 받을 것 아닌가 걱정됩니다. 선거 때면 없던 일도 폭로하는 판인데 자칫 이번 공천을 두고 별별 공격 자료가 다 나올 것 같습니다. 선거에 큰 이슈로 등장할 것 같습니다. 서울 선거가 어렵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서울 선거의 구도를 한번 생각하시고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건의드립니다.”
말이 나온 김에 단숨에 할 말을 다 했다. 그런데 전 대통령은 의외로 표정이 점점 진지해지고 있었다.
“이종찬! 나는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자네가 좋은 것 지적해주었군.”
전 대통령은 솔직했다. 그런 깊은 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 자리에서 이실직고한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솔직함이 그의 장점이었다.
“자네 말 들으니 그럴 것 같군. 하지만 두 사람을 다 물러나게 할 수는 없어. 만약 한 사람만 공천하면 누가 좋을 것 같은가?”
“노태우 장관을 공천하면 당을 대표하는 주자가 될 것이니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노태우 공천을 먼저 거론했다. 전 대통령은 노태우, 허청일 두 사람 가운데 택일한다면 허청일 쪽으로 기울 것이 확실했다. 그는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이미 오래전에 그 지역에 이사 와 많은 것을 투자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이 적중했다. “아냐. 허청일은 오래전부터 준비했어. 자기 말로 당선에 자신 있다고 하더군. 노태우는 전국구로 돌리면 되지. 그러면 빨리 돌아가 권 대표에게 윤길중 의원의 사표는 보류하라고 하게.”
노태우 장관이 그때 서대문에서 출마했다면 당시 새로 출현한 신민당 바람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당시 종로에 이민우 후보를 내세운 김영삼의 전략에 말려 얼마나 큰 돌풍이 불었나? 만약 노태우가 서대문에서 출마했다면 그 바람의 진앙이 종로가 아니라 서대문으로 옮겨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노태우 장관은 그때 그 태풍을 피하게 되었고, 그 후 순풍을 안고 승승장구해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런데 그런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나는 역으로 당했다.
--- p. 473~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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