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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도둑과 달팽이

시간 도둑과 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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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9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200g | 153*224*7mm
ISBN13 9791186091296
ISBN10 118609129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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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축축한 안개가 목덜미에 와 닿는 순간
뭔가 끈끈하던 것이 울컥,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이른 새벽 또다시 혼자 길을 나서고 말았다
기억이란 녀석은 참 어리숙한가 보다
매번 잊어버린다
사진 찍다가 메모리칩이 없음을 깨달은 순간의 황당함처럼
상처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반복된 상처임을 깨닫는다

보듬어야 할 기억과 버려야 할 기억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분명
바람이 아닌 것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때
풍경이 아닌 것이 풍경이 그려질 때 심한 혼돈을 겪는다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 했지만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

길을 걷다가
매일 드나들던 곳이 불현듯 낯선 길로 보일 때
가끔은 가슴을 아릿하게 스치는 순간이 있어
그 순간이 날카로운 면도날이 되어 피부를 벨 때

왜 한 방울의 뜨거운 핏물이 되고 싶은지
왜 한 방울의 차가운 눈물이 되고 싶은지


등꽃

볼 언저리 감싸는 햇살 손길에
수줍은 듯 떨군 고개
바람이 속삭이는 이야기에
넝쿨로 추억 엮는 그대여

인적 드문 골목길
다소곳이 마중 나온 그대가
휘어진 허리 포도송이처럼 매달려
바라본 하늘은
누구를 향한 눈길인지

은은한 향기
햇살에 풀어놓고
바람에 풀어놓는 날
그대가 내게 안부를 묻는다 여기겠네
바람이 골목 모퉁이를 돌 때
풍경이 잠시 한눈팔 때
나 그대에게 흔들렸다고 고백하겠네


[시인의 말]

나는 늘 꿈을 꾼다.

비쩍 마른 줄기를 뻗어
담장을 기어오른다.
손등이 뻘겋게 부풀어 오르고
무릎이 깨져 상처투성이다.

오늘도 나는
저 벽을 넘어보리라 안간힘을 쓴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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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꽃밭으로 기어가는 달팽이들에게는 어떤 비의(秘意)도 없다. 충동이 있을 뿐. 사실 ‘길’의 비의란 성공을 원하는 자들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자신을 읽도록 강요하는 신성한 텍스트이니 말이다. 때문에 ‘앎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는 자들에게 그것은 “시간 도둑”(「책 읽는 남자」)일 뿐이다. 반면 ‘몸의 시간’ 위를 기어가는 달팽이는 그 비의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 달팽이의 시간은 물렁물렁하고, 상처의 진물이 흐르는 곳에만 있다. 강현분의 달팽이는 평일에는 제 둥글린 몸을 빼서 “신풍장 여관” 골목을 기다가 일요일에는 주일 교회당 근처로 다시 기어나온다. 강현분에게 “여행의 끝은 집으로 향하는 길”(「귤 까는 여인-여행을 꿈꾸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시간 도둑과 달팽이』는 상처의 진물이 개화시킨 어느 꽃밭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우리도 함께 떠나보자. 이 환하디환한 꽃밭 속으로.
최종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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