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사람의 시시한 얘기가 진짜 인생 이야기거든. 날마다 듣는 진부한 얘기, 낚시 얘기, 잡담, 그게 우리 인생의 진짜 대화란 말야. 너무 목에 힘주고 재주 부리는 글이나 작품을 보면 방부제가 들어간 음식 같아. 싱싱한 맛이 없다구. 상추쌈에다 밥을 싸 담고 고추장을 꾹꾹 넣은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는 너도 잘 알잖아. 소설가니 철학자니 짜들 얘기하는 거 들어 보면 쉬운 얘길 왜 그렇게 어려운 말로 하는지 모르겠어.
p. 198
서구찬 씨는 참으로 인간답지 못하게 살았노라고.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산다는 추악함은 치욕이면서도 죄악이라고. 그렇다. 그는 참으로 인간답지 못하게 살았다. 그래서 한 전무는 마당바위에 세워 줄 서 사장의 비석에 이런 글을 넣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답게 살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참으로 인간스럽게 살다가 죽었다.
p. 9
'미늘'은 고기가 걸리면 낚싯바늘에서 바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거스러미를 뜻하는 우리말이다.
백화점을 소유한 서구찬 사장에게는 인생이 항상 미늘처럼 여겨졌다. 살아가면서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과 죄는 지워지지를 않고, 한 번 살 속에 박힌 낚싯바늘의 미늘처럼 과거는 인간의 발목을 잡고 놓아 주지를 않는다. 삶이란 과거에서 이어지는 현재일 뿐, 새로운 시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서구찬 사장은 삶에서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인생의 방향을 바꿔 보려는 시도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는 대신 자꾸만 도망을 친다. 힘들고 벅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예를 들어 이복 형제들 사이에서 재산 싸움이 났을 때도 그는 낚시 가방을 들고 도망을 쳤다.
서구찬은 이런 도피 여행 동안에 별장에서 수미라는 젊은 여자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애인 사이에서 갈등하며, 두 여자 가운데 아무도 선택하지를 못하고 고뇌하다가 죽음을 생각하기에 이르지만, 그러나 막상 자살할 용기와 결단력이 없어 또다시 도망친다.
두 여자 사이에서 아무런 해결과 해방의 길을 찾지 못한 서구찬은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서 무작정 낚시 여행을 나섰다가 우연한 차량 접촉 사고로 서울에서 내려온 한광우 전무를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되고, 함께 추자도의 푸랭이섬으로 갯바위 낚시를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감생이를 낚시하는 동안 서구찬은 자신과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며 행동으로 삶을 살아가는 한 전무의 자연아적인 모습을 보고는 용기를 얻어 어지러운 그의 인생을 정리하러 서울로 돌아간다.
그러나 막상 서울로 돌아온 서구찬은 이번에도 자신의 삶을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시작을 못 하고, 막연히 자살을 생각하며 한 전무가 목숨을 잃을 뻔한 똥여로 들어가기 위해 다시 추자도로 향한다.
필자가 1991년에 잡지 『문학정신』에 발표했다가 중편소설집의 표제작으로 삼았던 <미늘>은 거기에서 끝난다.
<미늘의 끝>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다음, 한 전무와 서구찬의 또 다른 낚시 여행에서 얘기가 시작된다. 그들 두 사람은 평도로 바다 낚시를 들어가고, 그곳에서 결국 인생의 얘기는 '끝'을 맺는다.
<미늘>도 필자의 주변 사람들이 겪은 얘기를 바탕으로 해서 쓴 작품이었다. 그리고 주인공 한 전무는 소설이 발표된 다음 몇 년 후에,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루는 이상한 사건을 당하게 된다.
pp. 7~8
두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이런 틈은 차츰차츰 윤곽이 더욱 분명해졌다. 남편이 잎차 한 봉을 두 차례 우려먹은 이유야 두 번째가 더 맛이 나기 때문이라고 치더라도, 낭비벽이나 사치와는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조금만 낡고 마음에 안 들면 그릇이나 옷 따위를 아내가 덜렁 내다 버리면 가난과 절약이 몸에 밴 남편은 아내가 버린 잡동사니를 걸핏 도로 주워 집안에 들여놓기가 일쑤였다. 노후를 위해서라도 벌어들이는 돈을 모두 악착같이 저축하려는 남편 그리고 늙으면 놀고 싶어도 기운이 없어서 못 논다면 벌어 놓은 돈이란 어느 정도는 젋어서 쓰고 살아야 한다는 아내 - 그들의 생활 철학은 타협이 쉽지 않았다.
pp. 354~355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일지는 몰라도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한 번 실수란 보다 개선된 미래를 위한 연습이 되지를 않았다. 인생은 연습을 하고 교정하면서 닦아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단 한 번뿐인 승부였고, 그래서 그는 젊은 남녀가 만나 결혼은 하지 않은 채로 일단 같이 살아 보다가 마음에 들면 결혼하고 아니면 상대를 바꿔 다시 선택의 여지를 넓히겠다는 현대식 인생 공식도 믿지 않았다. 사랑과 마음도 기계나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면 자꾸 낡기 때문이었다.
p. 336
"임마 너 그럴 수가 있냐?" 상현이 다시 따졌다. "생시도 아니고 꿈에까지 쫓아와서 정말 그런 식으로 사람 열을 올려도 되는 거냐구."
"꿈이라니?"
그래서 상형은 어젯밤의 물돼지꿈 얘기를 해주었다.
"KBS 친구한테 준 고기 도로 내놓으라구." 아내와 병학의 사이를 전혀 알지 못했던 상현은 엉뚱한 농담을 계속했다.
파도에 밀려 저만치 거리가 멀어졌던 병학이 슬금슬금 상현에게로 헤엄쳐 오더니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상현은 대답을 하기 전에 병학의 얼굴을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물돼지꿈 생각했어."
"어, 그거."
병학이 거북한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물돼지꿈'은 너무나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중요하고도 복잡한 사건이었다.
p. 234
"낚시도 끊을까 하다가 말았어요." 한 전무가 말했다. "언젠가 추자도에 들어가 40일 동안 낚시를 하고 서울로 올라갔더니 공장 꼴이 영 말이 아니더군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난 그날 밤 지하실로 내려가 시멘트벽에다 후려쳐 몇백만 원어치나 되는 낚싯대를 모조리 분질러 버렸어요. 다시는 낚시를 안 하겠다는 마음으로요. 그리고는 이튿날부터 다시 낚싯대를 사 모으기 시작했죠. 아무래도 낚시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겠더군요."
p. 60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일지는 몰라도 결혼에 있어서만큼은 한 번 실수란 보다 개선된 미래를 위한 연습이 되지를 않았다. 인생은 연습을 하고 교정하면서 닦아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단 한 번뿐인 승부였고, 그래서 그는 젊은 남녀가 만나 결혼은 하지 않은 채로 일단 같이 살아 보다가 마음에 들면 결혼하고 아니면 상대를 바꿔 다시 선택의 여지를 넓히겠다는 현대식 인생 공식도 믿지 않았다. 사랑과 마음도 기계나 마찬가지로 시간이 흐르면 자꾸 낡기 때문이었다.
p. 336
"임마 너 그럴 수가 있냐?" 상현이 다시 따졌다. "생시도 아니고 꿈에까지 쫓아와서 정말 그런 식으로 사람 열을 올려도 되는 거냐구."
"꿈이라니?"
그래서 상형은 어젯밤의 물돼지꿈 얘기를 해주었다.
"KBS 친구한테 준 고기 도로 내놓으라구." 아내와 병학의 사이를 전혀 알지 못했던 상현은 엉뚱한 농담을 계속했다.
파도에 밀려 저만치 거리가 멀어졌던 병학이 슬금슬금 상현에게로 헤엄쳐 오더니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상현은 대답을 하기 전에 병학의 얼굴을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물돼지꿈 생각했어."
"어, 그거."
병학이 거북한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물돼지꿈'은 너무나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중요하고도 복잡한 사건이었다.
p. 234
"낚시도 끊을까 하다가 말았어요." 한 전무가 말했다. "언젠가 추자도에 들어가 40일 동안 낚시를 하고 서울로 올라갔더니 공장 꼴이 영 말이 아니더군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난 그날 밤 지하실로 내려가 시멘트벽에다 후려쳐 몇백만 원어치나 되는 낚싯대를 모조리 분질러 버렸어요. 다시는 낚시를 안 하겠다는 마음으로요. 그리고는 이튿날부터 다시 낚싯대를 사 모으기 시작했죠. 아무래도 낚시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겠더군요."
p.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