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도(産道)를 지나 밖으로 나온 내가 감동한 나머지 ‘호오나~♪’ 하고 노래하자 나를 안고 있던 간호사와 의사가 실신해서, 나는 탯줄 하나에 매달려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엄마를 포함한 모두가 잠시 정신을 잃었고, 나는 30여 분간 거기서 그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기에, 내가 경험한 최초의 세계에는 위아래도 없었고 좌우도 없었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내 노랫소리뿐이었다. --- p. 9
“아니. 그런 게 아냐. 나는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에미코는 테이블 위의 ?제1화?와 ?제2화?를 바닥에 집어던진다. 자방! 하는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 위에 원고가 펼쳐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이랑, 내가 살면서 생활하고 있는 현실을, 제대로 명확히 구분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뭐가 진짜고 뭐가 거짓인지 모른다든지, 그런 게 없었으면 한다고!” 그런 뒤에 신문도 집어 들더니 바닥에 패대기친다. “이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현실에서 일어나다니 정말 기분 나빠! 이런 거, 정말 어떻게 좀 해줬으면 좋겠어! 우리 생활 속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해!” 그런 뒤 에미코는, 세이료인 류스이의 고단샤 노블스 여섯 권을 팔로 밀어 테이블 밑으로 떨어뜨린다. “이 말도 안 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소설도, 내 생활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면 해. 정말 기분 나빠?! 아! 진짜로 죽어줬으면 좋겠어. 이 세이료인 류스이. 정말 죽었으면 좋겠다. 응? 쓰토무 머리 좋으니까 할 수 있잖아? 이 세이료인 류스이, 찾아서 잡아 죽여줘. 제발. 이 현실과 여러 가지 거짓말들도 제대로 구별해주고.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확실히 해줘. 제발. 쓰토무라면 할 수 있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움직이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모른다, 같은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알았어.” 하고 나는 말한다.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 확실히 할게. ≪세이료인 류스이≫도 잡아서 뜨거운 맛을 보여줄게. 그런데 고단샤 노블스의 ≪세이료인 류스이≫는 어떻게 하지? 만약에 이 ?제1화?, ?제2화?랑 상관이 없다면.”
“아무래도 좋아. 진짜로 관계가 없다면, 그냥 가만두면 돼. 내가 죽여줬으면 하는 건, 우리 집에 말도 안 되는 소설을 보낸 ≪세이료인 류스이≫야. 그 자식은 찾아서 잡아 죽여.”--- p. 168~169
정말로 특권적인 죽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죽음을 맞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고 죽는 것이다. 위엄. 존경.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잃었다는 것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 안타까워해주는 것. 좀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주는 것. 좋은 추억. 만족감. 자신. 좋은 인생을 보냈다는 자부심. 이렇게 죽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죽음을 맞는 기쁨.
추리소설 속의 죽음에 그런 것은 없다.
추리소설이 대전大戰 중의 대규모 죽음을 경험하며 발달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그러면서 없어진 인간의 죽음이 갖는 존엄성을 추리소설가가 회복시키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잘 이용한 탓일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 갖는 존엄성이 없어짐으로써, 추리소설가는 등장인물을 죽이기 쉬워졌고, 상처를 주기 쉬워졌으며, 장난감으로 삼기 쉬워졌다는 것이다. 당돌한 살의와 황당무계한 동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사람의 죽음을 접하는 등장인물의 심리상황도 가벼이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죽음이 갖는 존엄성이라는 것에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추리소설 속에서 본래의 특권적 죽음이 그려질 가능성은, 그 이야기 속 사망자가 타살인 척하면서 자살을 시도하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것도 ≪명탐정≫이 등장해버리면 불가능해지고 실패하겠지만. --- p. 219~220
태초에 말이 있었다. 말은 신과 함께 있었다. 말은 신이었다. 요한복음서의 이 말이 옳다면, ≪쓰쿠모주쿠≫는 그야말로 신의 이름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이름이겠지.
하지만 나는, 신인 걸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
--- p. 467~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