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데카르트와 파스칼을 살펴보았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뛰어난 수학자요 철학자요 신학적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면서 사고 방식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경험을 뛰어넘어 오직 이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초시간적이고 영원한 진리에 관심을 보인 사상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성 판명하게,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하게 파악한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충고하죠.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화하는 일상적 삶은 여기서 관심 거리가 될 수 없고 일상성, 시간성, 신체성 등은 무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우리는 '수학적 사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파스칼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 역시 수학자로 출발했지만 경험과 관찰을 중시한 뛰어난 공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문제를 다룰 때도 일상적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일상인의 삶을 불안, 권태, 불안정으로 그린 것도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죠. 여기서는 시간성, 역사성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달라집니다. 데카르트가 관심을 두었던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과 세계를 근거짓는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하나님이었죠. 말하자면 전형적인 '철학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스칼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역사 속에 동참하며 고난받는 백성과 함께하는 약속의 하나님이었죠. 약속은 성취를 기다리며, 이 기다림은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죠. 그 하나님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고, 호소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때로는 불평하거나 원망할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우리는 '역사적 사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사고' 방식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입니다. 어떤 시간적 관점이나 역사적 관점에서 사고하기보다는 그야말로 시간과 역사, 어떤 한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생각해 보려고 했던 철학자죠. (...)
철학자들에게는 언제나 추종자나 적대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스피노자처럼 극단적으로 추종과 적대, 비난과 칭송을 동시에 받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가 살아 생전 자기 이름으로 펴낸 책이라고는 데카르트 철학을 해설한 책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신론적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으로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 하지만 스피노자는 당시 혁명적 사상가들이나 레싱, 셸링과 같은 독일 계몽주의 및 낭만주의 사상가들에게는 우상처럼 받들어졌습니다.
프랑스 혁명사를 쓰기도 했던 영국 시인 콜리지를 염탐한 첩자는 콜리지가 어떤 사람과 저녁 내내 '스파이 노저(Spy noza: '노저'라는 스파이 ; 스피노자를 영어식으로 이렇게 발음했던 모양입니다)에 관해서 이야기하더라고 당국에 보고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왕 이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더 하죠. 네더란드어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가 있으면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애야, 계속 그렇게 해. 그러면 시금치를 먹을 거야!" 공부와 시금치가 무슨 관계가 있냐구요? 아무 관계가 없죠. 원래는 "얘야, 계속 그렇게 해, 그러면 스피노자가 될 거야"라는 말이었죠. 그런데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동안 "스피노자가 될 거야"가 "시금치를 먹을 거야"로 바뀐 거죠. 보통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어떻게 알겠어요? 스피노자 보다는 '스피나지'(spinazie) 즉 시금치를 더 잘 알죠. 그래서 "스피노자가 된다" 는 말이 "시금치를 먹는다"로 와전된 것입니다. 어쨌든 스피노자의 명성이 그토록 높았다는 말이죠.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그토록 미워하거나 그토록 극찬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금기였던 종교 비판을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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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데카르트와 칸트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도덕적 언어로 전환시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하나님을 밀어내고 얼굴 없는 하나님, 얼굴 없는 신을 찾고자 했지요. 신과 자연을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데카르트와 칸트가 자연과 자유에 대해 이원론적 입장을 취했다면 홉스와 스피노자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자연을 중심한 일원론적 입장을 취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이에 비하면 파스칼은 하나님이 지으신 광대한 세계의 침묵, 그것의 무한함에 경탄합니다. 아니, 전율합니다. 이 우주에 비하면 인간이라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가 하는 인식 때문이죠. 그리고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인간은 위대하다는 역설적 인식을 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