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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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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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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1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02쪽 | 609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4980785
ISBN10 8984980781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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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령
나는 지금 죽은 친구의 '바람꽃' 같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 오래전 은비령에서 함께 고시공부를 하던 친구의 아내이다. 이제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던 날, 나는 문득 죽은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고, 약속 장소로 가던 길을 돌려 예전 우리(친구와 나)가 처음 만났던 은비령으로 향한다. 아직 그와 나 사이에 마음의 어떤 마지막 정리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남긴 메시지를 듣고 다음날 눈길을 헤치고 그녀도 은비령으로 온다.
거기서 우리는 혜성을 관찰하기 위해 그곳으로 온 한 사내를 만난다. 사내는 대부분의 행성이 일정한 공전주기를 가지고 있듯, 우리가 사는 세상도 2,500만 년을 주기로 똑같은 일들이 되풀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아픔도, 우리가 만나고 헤어짐의 인연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날 밤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묻고 묻히는 동안 나는 이번 생애가 길지 않듯, 앞으로 우리가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격정적인 사랑 속에 나는 어느 봄날 바람꽃처럼 내 곁에 왔다가 이제는 다시 이 세상에 없는 또 한 축을 따라 우주 속으로 고요히 흘러가는 별을 가슴에 담는다. 2,500만년 후 우리 다시 만날 약속을 하며.


1968 겨울, 램프 속의 여자
'1968년 '은 초기 산업화의 혼돈 속에서 우리의 누이들이 처녀지를 유린당하던 짐승의 세월에 대한 이야기다. 13살 어린시절 동네 누나의 잔치 전날 가마꾼들이 우리집으로 모여든다.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던 그 밤, 그들은 근처 사탕공장 여공인 은집을 집단 겁탈한다. 그녀는 뭉쳐준 눈으로 아랫도리의 피를 훔치며 눈물만 삼킨다. 나는 눈길을 헤쳐 돌아가는 그녀를 위해 오래 '남포'를 켜둔다.

그 여름의 꽃게
지독한 구두쇠이며 지주인 할아버지는 동네로 밀려드는 피난민들의 처지를 마뜩찮게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날마다 서성대는 피난민들이 귀찮아서 아예 대문 빗장을 몇 개 더 만들어 달았다. 같은 집에서 사는 삼촌은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열 일곱이 되도록 목발 없이는 문지방조차 넘지를 못하는 '병신'이다. 어느 날 역시 피난 내려온 처지인 한 계집애가 동네에 나타나더니 노골적으로 삼촌과 할아버지의 환심을 산다. 시금치처럼 파릇한 웃음과 야무디야문 처신으로. 결국 할아버지는 계집아이와 그의 아버지를 집으로 들이고 .
집안에는 목발을 내던진 채 울부짖는 삼촌의 짐승 같은 울음 소리와 가락지가 없어진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동구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할머니의 한숨 소리만 남게 되었다. 어린 나의 머리 속엔 빈 소라 껍질 속에서 살다가 몸이 커지면 더 큰 집으로 옮겨 사는 꽃게 이야기를 하던 미주의 냉랭한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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