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때려라, 실컷.
십팔, 십칠, 시입……, 욱! 별안간 명치로 어퍼컷이 훅 날아왔다. 젠장. 오른쪽을 세 번 쳤으면 공평하게 왼쪽도 세 번 쳐야지, 갑자기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다니. 아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치는 리듬을 전혀 탈 줄 모른다. 아니면 엇박자의 달인이든지. 도저히 다음 수를 못 읽겠다.
하긴 다음에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안다고 해도 특별히 나아질 건 없다. 그저 이어질 공격의 방향과 강도를 알면 그 짧은 사이에 내 몸 안에 에어백을 채우듯 숨을 들이마시는 걸로 대비 아닌 대비를 한다는 건데, 그래 봤자 아픈 건 똑같다. 간단한 산수다. 놀람 더하기 아픔에서 놀람을 뺀다고 해도 아픔은 그대로 남는다.
뭐, 생각해 보면 인생이라는 것도 바로 다음에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또 어떤 거지 같은 사건이 날 자빠뜨릴지 모르는 거다. 온갖 방어 방법을 열나게 연구해도 인생이란 놈은 언제나 나보다 세 수는 더 앞서 있다. 그러니까 이 치는 지금 나에게 인생을 맛보게 해 주는 셈이다.
--- pp.8~9
하지만 수리는 눈을 꼭 감고 얕게 숨만 쉬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몸을 뒤척였는데 고통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간호사는 수리의 안색을 살피더니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점퍼를 벗기는 과정에서 소매가 올라가면서 손목부터 팔꿈치 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게다가 잔뜩 부어올라 있었다.
간호사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환자가 언제부터 자해를 한 거죠?”
‘자해’라는 단어가 귓속으로 파고들어 드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난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고 강조하기 위해.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간호사는 다시 수리를 살피면서 침착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바짓단을 올려서 확인했다. 그런데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오른쪽 다리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꼭 나무로 만들어진 피노키오 다리 같았다. 두 눈을 크게 끔뻑였다가 다시 자세히 보니 피터 팬을 괴롭히는 후크 선장의 나무다리처럼 섬뜩했다. 나무다리 위에는 못으로 찧고 그은 자국이 가득했다.
--- pp.25~26
몇 주간의 맹연습 끝에 나는 혼자 의족을 차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처음으로 낯선 다리와 함께 혼자 걸은 것이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래서 바람에 눈물을 날리려고 조금씩 빨리 걸었다. 보폭이 점점 넓어졌다. 걷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뛰고 싶었다. 다칠 거라는 생각? 물론 들었다. 근데 여기서 다쳐 봤자 뭐. 그래 봤자 뭐! 화가 났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나무다리로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의족이 달릴 때의 충격을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평생 달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 pp.75~76
나는 가위질할 부분을 펜으로 그리는 것처럼 집 주변을 빙 돌아보았다. 집 뒤쪽에 있는 베란다의 창문이 열려 있었다. 나를 반기기 위해 열어 둔 것 같지는 않았다. 집 안에서 악취가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날씨가 제법 추운데도 악취 때문에 창문을 닫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심해로 뛰어내리기 위해 절벽 끝에 선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풀쩍 뛰어 창문을 타고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서면 그동안 누르고 있던 감정의 파도가 덮쳐 오리라 예상했었다. 낯설다, 따뜻하다 등등의 복잡한 감정일 거라고, 예방주사를 놓듯 생각했었다. 하지만 집에 들어선 순간 나를 사로잡은 건 충격이었다. 밖에서는 집 안에 이토록 많은 물건들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물건들이 여기저기에 탑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물건 탑 사이사이에 난 빈 공간들은 온몸을 타고 도는 핏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미로 같았다. 미로 속으로 걸음을 내딛을수록 숨이 막혀 왔다.
--- p.99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봐. 알아봤더니 쟤는 살인자의 딸이래. 그런데 그 아빠가 딸의 다리를 자르게 만든 뺑소니범을 죽였다나 봐. 그럼 손가락질할 수만은 없지. 그런데 뺑소니범뿐만 아니라 어린 딸까지 죽게 만들었다고? 세상에. 거미가 줄을 타고 올라간다는 동요처럼 계속 두 손가락이 맞물려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딱 멈추는 거야. 그러고는 돌아서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면서. 전염병 바이러스 취급이야. 그런데 누가 나 같은 애랑…….”
나도 모르게 내 처지를 줄줄 외다가 멈추었다. 그러는 넌 왜 혼자냐고 쏘아 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이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것처럼. 이상하게 이 녀석만 만나면 쓸데없이 말이 길어진다.
--- pp.135~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