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수령은 건강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자신이 가장 믿는 측근 열 명을 내밀히 불렀다. 그리고 그는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는 권총 열 자루를 꺼내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는 엄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일렀다. 만약 자신이 죽은 후 후계자인 아들이 자신의 노선에서 일탈해 함부로 체제 개혁에 손을 댄다면, “너희들 중 누구라도 바로 이 총으로 그를 사살해라.”
세계 어느 왕조의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었을 것 같은 유언이었다. 그러나 열 명의 신하 중 어느 누구도 이 유지遺志를 그대로 받들 사람은 없었다. 또 이를 입 밖에 내어 새 지도자에게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혹시 누구 하나 이 말을 전했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수사와 전제를 깔고 조심스럽게 추진됐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은 수령이 그의 친자식인 후계자에게 우회적으로 남긴 냉엄한 유언이었다. --- p.32~33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꿈도 꾸지 못한 또 다른 행운이었다. 그것도 너무 어마어마한 행운이어서 겁이 나기도 한 것이었다. 바로 그 당시 신에 가까운, 적어도 반신적인 존재로 변해가고 있는 위대한 수령의 따님이 그에 대한 애정 공세를 퍼붓는 것을 넘어 결혼까지 고집하는 것이었다. --- p.58
예능에도 능했다. 춤과 노래는 물론 악기도 잘 다뤘다. 특히 아코디언 연주는 아마추어 경지를 넘는 솜씨를 보여, 학교에 여흥이나 특별한 공연이 있는 경우 누구나 먼저 그를 찾았다. 훗날 김정일의 야회에 참석한 일이 있는 최은희도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 노래 실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맨 먼저 장성택을 꼽았다. --- p.64
장성택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가 높은 지위와 큰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장점과 정의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 p.66
뒤돌아보면 두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기는 러시아에서의 ‘귀양살이’ 같은 유학 시절이었다. 두 사람은 모스크바대학 옆 바빌로바 가 街 85번지 아파트 3층에 살았다. 이 아파트는 주러 북한대사관 소유로 모스크바대학과 도보로 불과 10분 정도 거리였다. 이곳에서도 물론 수령과 장군님의 그림자는 여전했지만 본국보다는 훨씬 엷었다. --- p.94
1972년 장성택과 김경희는 마침내 정식 부부가 됐다. 파란만장한 결혼은 온 세상의 축복 아래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말썽이 있었고 불가피한 희생도 따랐다. 장성택의 매형 집안이 일제 때 지주였다는 사실이 이 결혼에 장애로 등장했다. 이 문제는 장성택 본인이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누님과 매형은 쉽게 그의 처지를 이해해주었고 바로 이혼하는 절차를 밟았다. --- p.111
그는 권력이 바라면서도 말할 수 없는 일들을 미리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장성택은 허담과 함께, 김일성에게만 제한적으로 봉사하던 조직지도부 5과 담당의 ‘기쁨조’를 김정일에게도 봉사하는 조직으로 확
대 개편했다. 또한 북한의 명승지마다 김정일을 위한 ‘특각’을 만들도록 했다. 그 밖에도 ‘100호 물자’ ‘아미산 물자’ 등의 용어가 장성택의 활약이 시작되는 도상에서 떠오르게 됐다. --- p.119~120
필요한 물자는 장성택이 직접 해외 공관장들을 독려해 조달하도록 지시했다. 때로는 자신이 직접 해외에 나가서 구입에 간여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산 대리석, 북유럽산 고급 가구, 고급 샹들리에 등이 연이어 평양으로 들어왔다. 외부 사람들에게 이런 사업이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어째서 이런 사치가 필요한가?’
‘상식적으로 이런 일은 오히려 최상위 권력층에서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 p.120
장성택이 김정일의 수하로서 출셋길에 올라 약진하고 있는 사이, 가정 생활은 그와 반대로 어려움을 맞았다. 첫 번째 위기의 직접적인 배경은 김정일의 기쁨조 파티였다. 흔히 이 파티, 즉 야회에 관해 김정일이 권력의 자리를 굳힌 후 타락과 퇴폐에 빠져들게 된 상징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남한과 기타 외국에서는 이를 그저 엽기적인 호기심의 대상으로 입길에 올리기도 했다. --- p. 125~126
기쁨조 때문에 발생한 부부 사이의 문제가 엄청난 비극으로 끝난 경우도 있었다. 어느 간부의 부인은 남편이 참여하는 기쁨조 파티에 관한 불만을 편지에 담아 김일성에게 보낸 일이 있었다. 앞으로 수령님의
후계가 될 사람이 벌이는 퇴폐한 야회에 관한 유감과 우려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부인이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이 무렵에는 이미 김일성에게 가는 거의 모든 문서가 김정일 손을 거쳐간다는 것이었다. 김
정일은 이 편지를 그 간부에게 보여주고 본인이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 그는 집에 가서 자기 부인을 권총으로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 p.133
특히 청년운동은 그 역할이 주목과 기대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장성택은 조직과 리더십에 타고난 재능을 갖춘 데다 신성한 수령 집안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새로운 권력 김정일의 최측근으로서 유리한 장점을 최대한 살려 눈부신 활약을 했다. 장성택은 그 당시 국가적인 주요 관심사였던 수도건설사업 같은 정책 과제에 청년동맹의 역량을 최고로 동원해 여러 업적을 이루었다. 그는 상설조직으로 된 10만여 명의 ‘속도전청년돌격대’를 앞세워 수도 평양의 여러 건설 사업과 북부내륙선 철도공사를 비롯한 국가적 건설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 p.141
1970년대 말 장성택은 한 차례 이른바 ‘혁명화’ 과정을 겪게 된다. ‘혁명화’란 말은 외부 사람들이 들으면 실소를 할 일이지만, 김정일 치하의 북한에서는 고위직 인사일지라도 때로 일신상의 중대사가 될 만큼 엄중한 형벌이었다. --- p.148
장성택은 결국 평양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평안남도 강선에 있는 ‘천리마강선제강소’에서 작업반장으로 2년 가깝게 현장노동을 해야 했다. 김정일은 장성택을 혁명화 작업장으로 보내면서 엄격한 지침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혁명화 기간 중 매일 현장 책임자가 장성택의 동향을 보고해야 했다. 일체 면회는 안 됐다. 식사 등 모든 생활 조건을 일반 노동자와 똑같이 해야 했다. 그가 맡은 일은 쇳물을 나르고 주물을 하고 난 후 쇳덩어리에 붙은 모래를 털어내는 것으로 때로는 위험하기도 한 작업이었다. 장성택은 작업 도중 넘어져서 크게 다치기도 했다. 다리에 흔적이 크게 남을 정도의 화상을 몇 차례 입기도 했다. --- p.149
다른 한편으로 주변이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각방을 쓰고 서로 즐기는 파트너가 따로 있을지라도 장성택이 남긴 공백은 그렇게 쉽게 메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역설적이지만 장성택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파트너를 만나기도 싫어졌다. 싫은 정도가 아니었다. 주변에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얼쩡거리는 사람들의 꼴도 보기가 싫어졌다. --- p.151
그런데도 장성택은 충분히 2인자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김정일의 많은 측근 중에 특별한 지위를 누렸고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서 볼 수 없는 특별한 위상 그리고 독특한 역할로 존재했다. 때로 김정일의 지시
에 이견을 달기도 했다. 드문 예지만 반론을 펴기도 했다. 때로는 김정일의 즉흥적인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사업을 추진하는 일상적 여유도 있었다. 김정일도 일시적인 충동으로 무리
하게 사업 속도를 올리라는 지시를 한 다음에 장성택이 지시를 무시하고서 합리적인 일처리를 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일도 있었다. --- p.164
그러나 그가 특별한 위상을 갖는 원인은 또 있었다. 그가 가진 개인적인 인품과 능력이었다. 그를 가까이 했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가 사업 능력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과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다는 증언을 했다. 이것은 그가 사생활에 있어서 파격적인 타락의 행태에 빠져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독특한 신분으로 김정일의 신변 측근에 상당한 기간 가까이 있어서 주변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물론 황장엽도 장성택을 김정일 시대의 2인자로 당연하다는 듯 지목했다. --- p.165
김정일은 외마디 버럭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고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스테인리스 냅킨꽂이를 집어들어 자신의 매제를 치려고 했다. 부인 고영희가 김정일의 팔을 잡고 제지했지만, 그때의 상황은 이미 언어의 경지를 넘는 폭력의 상황이었다.
장성택은 즉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그는 김정일의 분노에 잠복해 있는 엄청난 진실과 그 진실의 파괴적인 힘을 느꼈다.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노래를 부르겠습니다.” --- p.167
한번은 공관에서 마련한 만찬에 참석해 술을 많이 마셨다. 그를 호텔 객실까지 데려간 북한 외교관은 그가 쏟아내는 말을 듣고 기겁하며 놀랐다. 거의 인사불성 상태로 알고 있었던 사람의 옷을 벗기려 넥타이를 풀어주자 장성택은 눈을 뜨고는 미처 무어라고 할 새도 없이 폭포수 같은 말을 쏟아냈다.
“동무, 큰일났어.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조국은 지금 말이 아니네. 사람들이 수만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네. 그야말로 진짜 고난의 행군이네. 조국에서 굶어 죽어가는 당원들, 간부들, 인민들을 생각하면 잠이 아니 오네. 술이라도 마셔야지. 굶어 죽는 사람들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 우리도 중국처럼 개혁 개방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위에서 한번만 결심을 하면 될 일인데,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 --- p.177똑
남한에서 정부가 바뀐 후 2005년 통일부 장관으로 북한을 방문한 정동영이 김정일을 만나는 자리에서 장성택의 안부를 물었다. 김정일은 장성택이 남한에 가서 폭탄주를 너무 마셔 건강을 해쳐서 쉬고 있다
고 했다. 사실 장성택은 세 번째로 ‘혁명화’ 조치를 당하고 있었다. 물론 김정일의 ‘폭탄주’ 운운은 아무 근거 없는 장난기 있는 말만은 아니었다. 김정일도 남한에서 장성택이 했던 언행을 전해 듣고 그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 p.205
그러나 그해 장성택과 부인 김경희는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외동딸 장금송이 유학 중이던 파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장성택이 정치적인 유배를 마치고 다시 공직으로 복귀하던 2006년이었다. --- p.210
이 시기에 장성택과 김경희 두 사람은 서로가 입 밖에 표현하지 않는 특이한 이해와 공감으로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둘 사이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이 자라났다. 어쩌다가 둘만 함께 있을 때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는 일이 많았다. 아무런 원망이나 질투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 감정에는 두 사람이 모두 초연할 수 있었다. 어쩌다가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인연으로 만났다. 그러고는 역시 특별한 환경, 신정의 권위와 봉건적인 문화 그리고 근대국가적인 통제 기술이 결부된 절대적인 권력의 그늘 아래서 특별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외도도, 방탕도 특이한 권력 체제 내에서 있을 수 있는 특이한 일들이었다. 이런 일들에 관해 서로 서글픈 이해에 도달하는 데 한동안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 p.219~220
장성택은 평소 김정일이 마음을 두고 있는 쪽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해외에서 분방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정남이나 유약한 정철보다 정은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정은을 잘 보좌하면서 천천히 자신이 구상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장성택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막내 아드님이 어떻겠습니까?”
김정일은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지만 안면에 얼핏 안도와 만족스러운 표정이 서렸다. 한참 만에 김정일이 말했다.
“그래, 막내를 세웁시다. 그러나 내가 공개하라고 할 때까지 이것은 비밀로 하십시오.”
그 후 김정일은 군부대나 당 중앙위원회 행사들에 김정은을 동반해 다니기 시작했다. --- p.232
12월의 평양은 추위가 매서웠다. 장성택은 그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운명은 오래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김정일의 사망과 김정은의 등극과 함께 그의 종말도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의 운명은 그보다 훨씬 전인 김경희의 열렬한 구애를 받았을 때, 아니면 그녀와 결혼을 하고 김정일에게 발탁되어 권력의 길로 나섰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유일영도체제라는 큰 틀 안에서 그가 설 자리는 극히 민감할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은 나이 어린 새로운 지도자가 절대 권력자로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더욱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 p.237
장성택은 개혁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국가안전보위부와 군부를 견제하고 당 정치국과 비서국에 개방적 성향의 인사들을 포진시켰다. 이와 동시에 개혁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제3경제, 즉 외화벌이 사업에 깊이 간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면서 결국 김정은의 심경을 건드리게 됐다. --- p.269
장성택이 10여 년 전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남한을 방문했을 때 숨겨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그때 남한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황장엽은 가까이 지내던 탈북 망명 인사를 급히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밀봉된 봉투 둘을 주면서 중요한 문제이니 집에 가서 혼자만 열어보라는 말을 했다.
첫 번째 봉투에는 장성택이 시내를 방문하는 기회가 생길 때 다른 쪽 봉투에 들어 있는 쪽지를 그에게 접근해 몰래 전해주라는 지시가 적힌 쪽지가 나왔다. 두 번째 봉투에서 나온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장성택, 지금도 늦지 않았다. 조국의 반역자가 되겠는가? 아니라면 남한에 남아라!” --- p.243
오랫동안 천천히 진행되어왔던 장성택의 최후는 일시에 닥쳐왔다. 일단 김정은이 마음을 다잡고 칼을 뽑아 휘두르기 시작하자 모든 기관, 모든 간부들이 그 칼끝에 따라 움직였다. 아무도 장성택을 위해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지라도 나설 수가 없었다. --- p.264
12월 13일 장성택은 바로 얼마 전 리룡하와 장수길이 섰던 그 자리에 세워졌고, 4신 기관총이 그의 몸을 찢었다. 남은 시신은 화염방사기로 불태워졌다. 물론 혹여 남은 시신의 일부라도 수습해 보존해줄 사람은 없었다. 장성택이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메시지라곤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 현장에서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남겨진 두 토막으로 부러진 볼펜 조각뿐이었다. --- p.266~267
장성택이 처형된 지 며칠 후 김정은은 측근 몇을 대동하고 고모 김경희 집을 방문했다. 문병 겸 그 사이 일어난 일에 관한 보고를 위한 것이었다. 형식적일망정 곁가지가 아닌 친고모에게 이런 절차를 밟는 것
이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김경희는 김정은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앉아 있던 의자 밑에서 권총을 꺼내어 그를 겨누었다. 질겁한 김정은은 몸을 피했고, 측근들이 달려들어 앞을 막고 총을 빼앗았다. 김경희는 별로 저항도, 반발도 하
지 않았다. 한마디 입을 떼지도 않았다. 단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