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는 반역이어야 한다
--- 00/02/01 김선희(rosak@hanmail.net)
민족주의라는 주제에 맞닥뜨릴 때면 어김없이 봉착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하나 있다.
'도대체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이 분야와 관련된 여러 책들을 읽다보면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제각각인 개념의 혼돈 속에서 어찌보면 동일한 대상에 대해 서로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부분만을 피터져라 외쳐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따지고 들자면, 학문의 세계에서 명확하고 똑 부러지는 것이 무엇이랴 만은.....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내세운 이 책을 통해 저자 임지현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뿌리깊게 자리잡은 민족에 대한 '신화적 이해' 혹은 '규범적 인식', 그리고 그로 인한 민족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이고도 맹신적인 집착에 대해 도전한다.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한 집착이 가져오는 폐해의 심각성은 민족주의가 수구적인 체제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었다는데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남한과 북한, 우파와 좌파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이념적 정당성을 민족주의에서 구하고자 하는 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국 '민족주의의 한국적 지형'에 대한 반성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설파하고자 하는 주안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성을 바탕으로 저자는 민족주의를 '운동사적 접근방법'을 통해 민족주의는 '반역이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민족주의는 고정불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운동'이라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민족주의는 더 이상 체제를 옹호하는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건설을 기약하는 반역의 이데올로기로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듯, 민족주의 또한 야누스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 특정 지역, 특정 시기마다 그 양상은 다를지 몰라도, 민족주의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하게 말해, 민족주의가 지니고 있는 보수와 진보, 수구와 개혁이라는 양면적인 모습이다. 결국 이러한 보수와 진보의 두 얼굴을 하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해 저자는 민족주의는 진보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각시키고자 하지만, 이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수구세력들에 의해 이용당해온 것이 역사적 현실이라면, 그것 또한 '경험적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왜 그렇게 되었던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민족주의는 불완전한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여타의 다른 사회 이데올로기들과 결합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서 어떠한 사회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가? 하는 점을 밝히는 작업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동안 적어도 한반도에 있어서 민족주의에 대한 당위적 주장이 경험적 인식을 압도했다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반역'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 또한 똑같은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20세기말에 불거져 나온 구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인종청소라는 '역사적 현실'은 누구나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지는 몰라도, '신화'로서의 민족주의는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경험적 사실이다.
물론 저자 자신이 민족주의에 대한 자신의 일관된 관점을 '민족주의의 현실적 역동성을 인정하고 그 역동성의 비밀을 역사적 존재 조건과 사회적 총관계 속에서 풀어나가는 것'(p. 26)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저자가 취하고 있는 운동사적 접근방법은 민족주의가 사회적 실재임을 강조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입장은 민족주의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민족주의의 지향점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역사적 변화에 열려 있는 사회적 실재'가 아닌 '역사적 변화를 가로막는 사회적 실재'로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반성. 그것이 바로 저자의 문제의식이 아닌가 한다. 저항 이데올로기로서의 건강성을 상실하고 체제 이데올로기로서 전락해버린 현실에 대한 개탄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임지현의 문제의식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 동안 여기 저기 발표한 학술논문들의 모음집이다. 다소 '원색적인' 표현의 제목과는 달리 이 책에 수록된 대다수 논문들은 동유럽, 그것도 '폴란드'라는 특정 국가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글들이다. 이것은 물론 저자의 학문적 경력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라면 다소 부담스러운 내용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